르포코리아2026-09-08 18:47
여명도 괴물도 없었다 — 가장 많이 인용되는 그람시의 문장에 대하여
그람시 편을 만들면서 대본에 넣으려던 문장이 하나 있었다. 워낙 유명한 구절이라 별 의심 없이 집어넣었는데, 검증 단계에서 걸렸다. 널리 퍼진 형태 그대로는 원문에 없더라는 것이다.
먼저 그 문장부터 보자. 이런 식으로 돌아다닌다.
낡은 세계는 죽어가고 새로운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여명의 순간에 괴물들이 나타난다.
좋은 문장이다. 시대의 혼란을 이만큼 압축한 표현도 드물다. 칼럼에도 강연에도 정치인 연설문에도 쓰인다. 나도 쓰려고 했으니 남을 탓할 것도 없다.
그런데 원문에는 여명도 괴물도 없다.
La crisi consiste appunto nel fatto che il vecchio muore e il nuovo non può nascere: in questo interregno si verificano i fenomeni morbosi più svariati.
직역하면 이렇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 것은 아직 태어날 수 없다. 이 공백기에는 다양한 병적 현상들이 나타난다.
핵심적으로 바뀐 표현은 둘이다. interregno가 '여명'이 되었고, fenomeni morbosi가 '괴물'이 되었다. 공백기는 왕이 없는 빈 시간을 뜻하는 낱말이지 새벽빛이 아니다. 병적 현상은 의사가 쓰는 말이지 신화 속 짐승이 아니다. 그람시는 진단하고 있었는데, 옮겨진 문장은 예언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짚을 게 있다. 번역이 서툴러서 생긴 일이 아니라는 거다. 서툰 번역은 밋밋해지지 화려해지지 않는다. 이건 반대 방향으로 갔다. 누군가 손을 댔고, 손댄 판본이 원본보다 잘 팔렸다.
잘 팔린 이유도 뻔하다. '공백기의 다양한 병적 현상'은 인용해봐야 폼이 안 난다. 문장에 극적인 데가 없고, 읽는 사람을 각성시키지도 않는다. 반면 '괴물들이 나타난다'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예언이다. 사람들은 그람시에게서 분석가가 아니라 예언자를 원했고, 시장이 원하는 물건은 어떻게든 만들어진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문장을 인용한 사람들 중에 이탈리아어 원문을 펼쳐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거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검증에 걸리지 않았으면 그대로 내보냈을 것이고, 그 영상을 본 사람은 또 그것을 인용했을 것이다. 확인하지 않은 것이 확인하지 않은 채로 굴러다닌 셈이다.
인용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출처를 밝히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은 권위를 빌리는 행위다. 그람시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 문장은 검증 대상에서 빠져나간다. 이름값이 근거를 대신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인용이라는 게 대개 이렇다.
진실을 대하는 태도라는 건 별게 아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났을 때 원문을 한 번 펼쳐보느냐 마느냐, 그 사소한 갈림길이다. 대부분은 펼치지 않는다. 펼치는 데 드는 에너지가 아까워서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 가짜로 밝혀지는 게 싫어서이기도 하다. 후자가 더 크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는 그 문장을 원문대로 고쳐서 내보냈다. 훨씬 밋밋해졌다. 그래도 그게 그람시가 쓴 문장이다.

"We Must Stop This Brain from Working for Twenty Years" — Gramsci and the War of Position
* 원문 대조는 이탈리아어 비평판(Einaudi, Quaderni del carcere vol. I, p.311) Q3 §34 스캔본으로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출처 표기를 vol. III로 잘못 적었다가 검증에서 또 걸렸다. 남의 인용을 흉본 글에서 내가 같은 실수를 한 셈이다. 사료를 다루다 보면 이런 일이 계속 나온다. 다음에도 걸리는 게 있으면 또 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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