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왜 반공포로를 석방했나
미국이 준 조약
0:02준 것이 아니라, 받아낸 것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서명됐습니다.
70년 넘게 이 나라의 안보를 떠받쳐 온 문서입니다.
이 조약을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기억합니다.
미국이 한국에 준 것.
이승만은 미국이 세운 대통령이었으니, 그 미국이 챙겨준 것.
그런데 그 몇 달 사이 워싱턴에서 오간 문서를 펼쳐보면 —
미국은 이 조약을 맺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을 구금할 계획을 만들어 두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몇 달을 따라가 봅니다.
철조망 안의 전쟁
0:30돌아가면 죽는다 — 짐작이 아니었다1953년 봄. 정전 협상은 거의 끝나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나가 남았습니다. 포로였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포로는 제 나라로 돌아갑니다. 그게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말이 어떤 무게였는지를, 먼저 보셔야 합니다.
수용소 철조망 안은 포로들의 자치구에 가까웠습니다.
공산 포로들은 수용소 안에 조직과 지휘 계통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금속 가공을 배워 온갖 무기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수용소 안의 통제권을 쥐었습니다.
미군은 밤에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포로들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서 인민재판이 열렸습니다.
1951년 9월, 열다섯 명이 인민재판으로 살해됐습니다.
구타와 살인은 처벌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52년 4월 8일, 유엔군이 포로 심사를 시작합니다.
북으로 돌아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한 사람씩 물었습니다.
일곱 개 수용소가 심사팀의 진입을 거부했습니다. 3만 7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5월 7일.
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됩니다.
면담 요청을 받고 철문 앞에 섰다가, 그대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미군이 포로에게 사령관을 빼앗긴 겁니다.
후임 사령관 콜슨은 각서에 서명하고 도드를 돌려받습니다.
포로를 죽이고 다치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문서였습니다.
공산 측은 그 각서를 곧바로 선전에 이용합니다.
그 뒤 유엔군은 수용소를 잘게 쪼갭니다.
포로들은 본토 여러 곳으로 나뉘어 옮겨집니다.
그래서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이 전격 실행될 때 거제에는 그들이 없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앞의 그 말이 다르게 들립니다.
돌아가면 죽는다.
그건 짐작이 아니었습니다. 철조망 안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남겠다고 한 사람이 2만 7천 명이었습니다.
이승만이 본 것
2:06그가 원한 것은 미국을 문서로 묶는 것이었다이제 이승만 쪽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는 정전에 반대했습니다.
통설은 이것을 북진통일을 외친 노인의 고집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가 3년 전에 무엇을 겪었는지를 놓고 보면, 다르게 읽힙니다.
1949년 6월, 미군 전투부대가 한국에서 철수합니다. ⚠근거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 방위선을 발표하면서 한국을 그 선 밖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북이 내려왔습니다.
이승만은 미군이 없는 한국이 어떻게 되는지를 3년 전에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정전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정전만 하고 미군이 또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3년 전이 그대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그가 원한 것은 하나였습니다.
미국을 문서로 묶어두는 것. 상호방위조약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 문서를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관심은 유럽이었습니다.
아시아 대륙에 발이 묶이는 것을 피하려 했습니다. ⚠근거
조약을 맺으면, 한국이 다시 전쟁을 시작해도 미국이 끌려 들어갑니다.
더구나 그 상대가 북진을 외치는 대통령이라면요.
이승만에게는 카드가 없었습니다.
군사력도, 돈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은 하나뿐이었습니다. 판을 깰 수 있다는 것.
그가 정전을 거부할 때마다, 미국이 짜놓은 계획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그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1953년 5월 29일, 워싱턴에서 국무부와 합참이 마주 앉습니다.
회의록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클라크는 극단적 비상조치로서 이승만을 구금할 준비를 해두었다."
"Clark has prepared as an extreme emergency measure to take Rhee into custody."
클라크는 유엔군 사령관입니다.
계획에는 이름도 붙어 있었습니다. 에버레디.
동맹국 대통령을 구금하는 일이 계획서에 적혀 있었던 겁니다.
통설은 이승만을 미국이 세운 대통령이라고 부릅니다.
세운 쪽이, 왜 그를 구금할 계획을 만들어 두었을까요.
6월 18일 새벽
3:45문이 한꺼번에 열렸다1953년 6월 18일. 자정과 새벽 사이였습니다.
여러 곳의 수용소 문이 한꺼번에 열렸습니다.
"6월 18일 자정에서 새벽 사이, 약 2만 5천 명의 송환 거부 북한군 포로가 부산·마산·논산·상무대의 유엔군사령부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Between midnight and dawn on the morning of June 18, some 25,000 nonrepatriate North Korean prisoners escaped from United Nations Command camps at Pusan, Masan, Nonsan, and Sang Mu Dai, Korea."
미 국무부 외교문서에 적힌 문장입니다.
한국 측 기록은 여덟 개 수용소 3만 5천여 명 가운데 2만 7천여 명으로 셉니다. ⚠수치
두 숫자가 다릅니다. 어느 쪽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문을 연 것은 한국군 경비병이었습니다.
막기 위한 임무를 받은 사람들이, 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포로들은 어둠 속으로 흩어져, 주민들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다시 잡아들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같은 날 이승만은 성명을 냅니다.
"제네바 협약에 비추어도, 인권의 원칙에 비추어도, 반공 한국인 포로들은 훨씬 전에 석방됐어야 했다."
"By the Geneva Convention and by the principles of human rights, the anti-communist Korean prisoners should have been released long ago."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해 온 '일방적 행동'의 시작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I want to assure you that this is not the beginning of the 'unilateral action' we have spoken of."
이미 벌어진 뒤였습니다.
워싱턴
4:47워싱턴의 최고 회의가 그를 부른 이름소식은 곧바로 워싱턴에 닿았습니다.
그날 백악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열립니다. 제150차 회의였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주 직설적인 전문을 작성하고 있다. 그가 처신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떠나야 할 수도 있다고."
"We are drafting a very blunt message to President Rhee, telling him that if he does not behave we may have to withdraw."
"이승만과 그 지지자들은 계속 싸우기를 원한다. 요컨대 그것이 전부다."
"Rhee and his supporters want to keep on fighting. That, in short, is all there is to it."
국무장관 덜레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을 어뢰로 격침시키고 미국의 손을 강제하려는 마지막 필사적 시도를 하고 있다."
"President Rhee is making a last desperate attempt to torpedo the armistice and force the hand of the United States."
이 발언들은 우리가 옮긴 말이 아닙니다.
미 국무부가 펴낸 외교문서집에 실린 회의록입니다.
통설이 이승만을 미국의 대리인이라 부를 때,
정작 그 미국의 최고 회의는 그를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워싱턴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지독한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받았나
5:37그가 원한 것은 제4조였다그리고 미국은, 사람을 보냅니다.
국무차관보 로버트슨이 서울에 옵니다. 회담은 보름 넘게 이어집니다. ⚠근거
6월 26일, 덜레스가 서울로 전문을 보냅니다.
"상호방위조약의 '보장'은 물론 상원의 권고와 동의를 받아야 한다."
"…although 'guarantee' of mutual defense pact is of course subject to Senate advice and consent accordance US constitutional processes."
조약이 협상 탁자에 올라온 겁니다.
이승만이 3년 동안 요구해 온 그 문서입니다.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됩니다. 한국은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근거
그리고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서명됩니다.
그럼 그 조약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까요.
이 조약은 양쪽에서 다 부풀려집니다. 그래서 조약문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흔히 이 조약이 미군의 자동 개입을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조약문에는 그런 문장이 없습니다.
"각자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would act to meet the common danger in accordance with its constitutional processes."
제3조입니다. 자동이 아니라, 각자의 절차를 거칩니다.
제4조는 미국이 한국 영토에 군대를 둘 권리를 갖는다는 조항입니다.
병력을 아홉 배로 보낼 의무도, 국방비를 미국이 전액 대라는 조항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원한 것은 자동 개입이라는 문구가 아니었습니다.
제4조입니다. 미군이 한국에 남는다는 것.
1949년에 떠났던 그 군대를, 이번에는 문서로 붙잡아 둔 겁니다.
조약은 여섯 개 조항짜리 짧은 문서입니다. 무게는 그 한 조항이 만들었습니다.
가까이서 본 사람들
6:50워싱턴과 현장의 온도가 달랐다이승만은 워싱턴의 정치인들에게, 아시아 약소국의 골치 아픈 늙은이였습니다.
반면 한국에 와 있던 미군 지휘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초대 8군 사령관 워커는 끝내 이승만의 신뢰를 얻지 못했습니다. ⚠근거
그런데 오래 겪은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집니다.
제2대 8군사령관 겸 제2대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에서는 타협을 몰랐고, 불가능한 일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마음속에는 깊은 애국심으로 가득했고, 귀국 후 눈 뜬 시간의 거의 전부를 나라를 위해 바쳤다."
"He was uncompromising in his hatred of communism, insistent to the point of the impossible in his demands, but his heart was full of a deep patriotism, and after his return he gave nearly every waking hour to his country."
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그를 위대한 애국자, 강철 같은 사나이라고 불렀습니다.
훗날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밴 플리트는 플로리다에서 날아와 유해를 모시고 한국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끝까지 지켜본 뒤에 돌아갔습니다.
뒷날 밴플리트 장군 후임인 테일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If Vietnam had had a leader like Korea's Syngman Rhee, Vietnam would not have fallen to the communists."
그리고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클라크.
2장에서 보셨듯이, 이승만을 구금하려고 했던 그 사령관입니다.
"한국의 애국자 이승만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지도자로 존경한다."
"I respect the Korean patriot Syngman Rhee as the greatest anti-communist leader in the world."
구금 계획을 세운 사람이, 같은 사람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맥아더는 더 오랜 인연입니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소령이던 시절부터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근거
광복 뒤 이승만이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맥아더의 조치였습니다. ⚠근거
1950년 초, 도쿄에서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캘리포니아를 방위하듯 대한민국을 방위하겠습니다." ⚠근거
"I will defend the Republic of Korea as I would defend California."
이승만 대통령이 역대 미군 장성 가운데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맥아더와 밴 플리트였습니다. ⚠근거
워싱턴과 현장의 온도가 달랐습니다.
멀리서 본 쪽은 그를 골칫거리로 보았고,
가까이서 오래 겪은 쪽은 그를 달리 보았습니다.
받아낸 것
8:39준 것이 아니라, 받아낸 것정리해 보겠습니다.
미국은 이 조약을 맺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을 구금할 계획까지 만들어 두었습니다.
최고 회의에서는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몇 달 끝에, 조약이 서명됐습니다.
미 국무부 외교문서집은 그 대목에 이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에버레디 작전의 검토 — 그리고 상호안보협정을 택해 에버레디를 실행하지 않기로 한 결정."
"Consideration of Operation Plan EVERREADY; Decision not to Implement EVERREADY in Favor of a Mutual Security Pact."
제거할 것인가, 조약을 줄 것인가.
미국은 그 둘을 저울에 올려놓고 있었고, 조약 쪽을 골랐습니다.
이승만에게 비판적인 학자도 이 대목은 이렇게 적습니다.
"이승만은 전 세계의 패자로부터 최대의 '자릿세'를 뽑아냈다." ⚠대조
"Rhee extracted the maximum 'protection money' from the world's hegemon."
우리 편 학자의 말이 아닙니다.
풀려난 2만 7천 명이 그 뒤 어떻게 살았는지는, 다음 과제로 남깁니다.
다만 이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통설은 그를 미국이 세운 대통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문서 속의 그는, 미국을 상대로 판을 흔든 사람입니다.
그는 미군 없는 한국이 어떤 일을 겪는지 3년 전에 봤고,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미국을 문서에 묶어두려 했습니다.
조약은 준 것이 아니라, 받아낸 것입니다.
이 편이 딛는 사료 · 11
- FRUS 1952–1954, Korea, vol. XV, Part 1, 제6장 — 에버레디에서 상호방위조약으로1953-04-26 ~ 1953-06-08
- FRUS 1952–1954, Korea, vol. XV, Part 1, Document 559 — 국무부·합참 회의1953-05-29
- FRUS 1952–1954, Korea, vol. XV, Part 2, Document 607이승만 → 클라크 · 1953-06
- FRUS 1952–1954, Korea, vol. XV, Part 2, Document 606 (Editorial Note)1953-06-18
- FRUS 1952–1954, Korea, vol. XV, Part 2, Document 609 — NSC 제150차 회의록1953-06-18
- FRUS 1952–1954, Korea, vol. XV, Part 2, Document 640 — 덜레스 전문덜레스 국무장관 · 1953-06-26
-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10-01)1953-10-01
- Mark W. Clark, 『From the Danube to the Yalu』, 1954 — 쪽수 확인 중Mark W. Clark · 1954
-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966, 제11장Walter G. Hermes · 1966
- 남정옥(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6·25전쟁시 미군 장성들이 이승만을 존경한 이유」, 뉴데일리 2016.8.16남정옥 · 2016-08-1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반공포로 석방」 · 국가기록원 002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