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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왜 열차를 돌렸나 — 6.25, 통설과 사료

세 장면, 한 사람의 이름

0:02세 장면, 한 사람의 이름

1950년 6월 25일 새벽 네 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무너졌습니다.

그 나흘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26일 낮, 의정부가 뚫리고

27일 새벽, 대통령이 서울을 떠납니다.

28일 새벽 두 시, 한강 다리가 끊어집니다.

그 며칠의 이승만을,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기억합니다.

"서울은 안전하다"고 속였다.

시민을 두고 저 먼저 떠났다.

한강 다리를 끊어 150만을 버렸다.

세 장면입니다. 그리고 세 장면 모두, 한 사람의 이름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기록에서 찾으면 —

그 자리마다, 다른 이름이 나옵니다.

오늘은 그 이름들을 따라가 봅니다.

그 문장은 어디서 왔나

0:41그 문장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서울은 안전하다. 동요하지 말라."

1950년 6월, 라디오에서 그런 방송이 흘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민들은 그 말을 믿고 남았고, 대통령은 이미 서울에 없었다 — 그렇게 이야기는 굳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이상한 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

누가 언제 처음 그렇게 적었는지를 찾으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 방송이 정말 있었다면,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마침 그때, 한국 라디오를 통째로 듣고 있던 곳이 있습니다.

미국의 해외방송정보국, FBIS입니다.

감청한 내용을 날짜별로 받아 적어 워싱턴에 보고했고, 그 전사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기록을 찾아보면 —

이승만의 방송은 있습니다.

다만 서울에서 한 방송이 아닙니다. 27일 밤, 피란지 대전에서 한 방송입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대사 기록영상 아카이브 「이승만 대통령 대전 라디오 연설 복원본」1950-06-27

"RHEE broadcast, 27 June. U.S. aid is on the way. MacArthur, Truman contacted."

이승만 방송, 6월 27일. 미국의 원조가 오고 있고, 맥아더와 트루먼에게 연락했다 — 그런 내용입니다.

이 전사에 남아 있는 이승만의 방송은, 이 27일 대전 방송이 처음입니다.

그러니 서울에서 흘러나온 방송이 무엇이었든 —

설령 거기에 "서울은 안전하다"는 말이 있었다 해도,

그건 이승만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말 자체도, 전사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럼 시민들을 서울에 붙잡아 둔 그 말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기록은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남정옥, 「6·25전쟁과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지도」, 『軍史』 제63호, 20072007-06

"국군은 서울을 사수한다. 지금 국군은 반격 중이다."

이 발표를 한 곳은 육군본부였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연구는, 이것을 '거짓 발표'라고 적습니다.

시민이 피란 준비조차 못 한 채 서울에 남은 이유로 이 발표를 듭니다.

대통령의 방송에는 그 문장이 없습니다.

시민을 붙잡아 둔 말은, 군이 했습니다.

70년 넘게 이승만의 입에 붙어 있던 그 한 문장은 —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떠남

2:23떠난 것과 남긴 말은 다른 문제다

두 번째로 붙은 말은 이겁니다.

"저 먼저 도망쳤다."

그가 27일 새벽 서울을 떠난 건,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우리는 그걸 '도주'라고 불러왔습니다.

그 판단을 하기 전에, 그때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봐야 합니다.

정부 수립 스물두 달. 군사력도 경제력도 북한에 밀렸습니다.

개전 전날까지, 전군에 휴가령이 내려 있었습니다. ⚠근거

미국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개전 다섯 달 전인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 방위선을 발표하면서 — 한국을 그 선 밖에 두었습니다. ⚠근거

미국 안에는 한반도를 포기하고 일본을 교두보로 삼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근거

스물두 달 된 나라의 대통령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가 쓴 비망록이, 개전 이튿날 새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기록한 비망록의 내용을, 그대로 옮깁니다.

프란체스카, 「6·25와 이승만 대통령」, 『중앙일보』 1984.6.24 (및 비망록 단행본)1984

26일 새벽 3시. 대통령이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걸겠다고 대답했다.

프란체스카, 「6·25와 이승만 대통령」, 『중앙일보』 1984.6.24 (및 비망록 단행본)1984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 라고 고함쳤다.

프란체스카, 「6·25와 이승만 대통령」, 『중앙일보』 1984.6.24 (및 비망록 단행본)1984

나는 너무나 놀라 수화기를 가로막았다.

프란체스카, 「6·25와 이승만 대통령」, 『중앙일보』 1984.6.24 (및 비망록 단행본)1984

대통령은 "마미,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 가는데 사령관을 안 깨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라며 몸을 떨었다. 상대편도 미국 국민이 한 사람씩 죽을 것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각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하더니 맥아더 사령관을 깨우겠다고 했다.

이 통화 정황은, 미국 외교문서로도 확인됩니다.

27일 새벽. 각료들이 관저로 뛰어듭니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합니다.

비망록은 그의 답을 이렇게 전합니다 —

프란체스카, 「6·25와 이승만 대통령」, 『중앙일보』 1984.6.24 (및 비망록 단행본)1984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조

각료들의 설득 끝에, 그는 그날 새벽 열차에 오릅니다.

그런데 대구까지 내려간 뒤, 열차를 돌립니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란체스카, 「6·25와 이승만 대통령」, 『중앙일보』 1984.6.24 (및 비망록 단행본)1984

"내 평생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 했어.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 ⚠대조

그러나 북상하던 열차는 대전에서 멈춥니다.

1장에서 본 그 방송이 — 그날 밤 대전에서 나옵니다.

떠나지 않겠다고 버티다 떠밀려 나갔고, 내려가다 되돌아왔습니다.

이 사람을, 먼저 도망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덧붙이자면, 전시에 지휘부가 수도를 떠나는 건 병법의 기본입니다.

게다가 서울은, 애초에 지켜낼 수 있는 지형이 아닙니다.

임진왜란에도 병자호란에도, 서울은 버려졌습니다.

석 달 뒤 서울을 되찾을 때는 북한군 두 개 사단이 지켰지만, 일주일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근거

1940년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떠났고,

1941년 소련은 모스크바의 정부 기능을 동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넉 달 뒤, 인천상륙 이후 유엔군이 북진하자

김일성도 평양을 버렸습니다. 북한 정부는 강계로 물러났습니다.

같은 행위입니다. 그런데 한쪽만 '도주'로 불립니다.

남는 문제는, 떠남이 아닙니다.

떠나는 동안 서울에 남은 말이었습니다.

남정옥, 「6·25전쟁과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지도」, 『軍史』 제63호, 20072007-06

"국군은 서울을 사수한다. 지금 국군은 반격 중이다."

그 말을 한 곳은, 그가 아니었습니다.

그 손은 누구의 것이었나

5:15그 손은 이승만의 것이 아니었다

세 번째, 가장 무거운 장면입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

이것도 이승만이 시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폭파는 28일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났습니다.

명령이 어디서 나왔는지, 기록을 찾아보면 —

기록마다, 다른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국내 전사는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을 지목합니다.

그런데 미 육군 공식 전사는 다르게 적습니다.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US Army CMH, 19611961

"국방차관이 01시 30분에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채병덕 본인은, 자신이 명령하지 않았다고 부인했습니다.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US Army CMH, 19611961

"명령을 내린 것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 관료였다는 견해를 강하게 뒷받침한다."

실행한 사람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었습니다. 이건 양쪽 기록이 같습니다.

미군 고문단은 다리를 늦게 끊으라고 요청했습니다.

병력과 장비를 남쪽으로 빼야 했으니까요.

그 요청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폭파 순간, 다리 위에는 아무 경고도 없었습니다.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US Army CMH, 19611961

"500명에서 800명이 죽거나 물에 빠졌다."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는 종로경찰서 경찰 77명입니다.

정확한 규모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그리고 강 북쪽의 국군 주력이, 퇴로를 잃었습니다.

실행자 최창식은 그해 9월, 총살됐습니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끝내 하나로 적히지 않았는데,

명령을 받은 사람만 죽었습니다.

13년이 지나, 군법회의가 그의 재심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죄가 됐습니다.

결정문이 든 근거는 이것이었습니다 —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재심 결정·판결 (1963–1964) — 최창식 사건1963-08-27 / 1964-10-23

"절대적 구속력이 있는 상관의 작전명령"

명령을 따른 것은 죄가 아니라는, 형법이 정한 정당행위입니다.

통설은 이 장면을 이승만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기록을 펴면, 그 자리에 있는 이름들이 서로 어긋납니다.

확실한 건 하나입니다. 그 손은, 이승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직하게 남기기

6:54

속이고, 먼저 떠나고, 다리를 끊었다.

통설은 그 세 장면을, 한 사람의 이야기로 묶었습니다.

기록을 펴면, 그 자리마다 다른 이름이 있었습니다.

"서울은 안전하다"는 그 문장은 전사에 없었고, 시민을 붙잡아 둔 말은 육군본부에서 나왔습니다.

떠나지 않겠다고 버틴 기록이 남아 있고, 같은 일을 넉 달 뒤 평양에서도 했습니다.

다리의 명령은 기록마다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데, 실행한 사람만 총살됐습니다.

그날의 비극은 사실입니다. 끊긴 다리도, 강 북쪽에 남은 150만도.

다만 그 비극에 붙은 이름이, 기록과 맞지 않습니다.

사료비판은 영웅을 세우는 일이 아닙니다.

통설을 기록에 대보고, 어긋나는 자리를 정직하게 남기는 일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조금 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 편이 딛는 사료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