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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평양에서 무엇을 보았나

1948년 7월 11일, 경교장

0:00

1948년 7월 11일 오전 열한 시. 경교장에 손님이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중화민국 공사 유어만. 이야기는 한 시간 남짓 이어집니다.

그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 머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극비로 취급할 것."

둘째 장, 김구의 말이 적힌 대목 옆에

누군가가 손으로 그은 밑줄이 있습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러시아는 그 군대를 손쉽게 남침에 써먹을 것입니다."

일흔한 살

0:27그는 보러 갔다고 말했다

김구는 분단을 막으려 38선을 넘었다.

통일을 위해 평양으로 갔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 서술에는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평양에서 무엇을 보고 왔는지.

돌아온 지 두 달 뒤, 그는 중화민국 공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연석회의에 간 동기 가운데 하나는, 북조선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보러 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본 것을 아주 정확하게 말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 일흔하나였습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편지를 보내고 한 달을 기다렸다

0:59답은 없었다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합니다.

단독정부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엿새 뒤인 2월 16일,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명의로 편지 한 통을 북으로 보냅니다.

받는 사람은 김일성과 김두봉.

서울의 소련군 대표부를 거쳐 전달됐습니다.

남북 요인이 만나 이야기해 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북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달 가까이 답이 없습니다.

그 침묵의 이면이 뒤에 공개됩니다.

소련군정의 레베데프가 남긴 비망록입니다.

3월 10일, 레베데프가 그 편지를 두고 김일성에게 묻습니다.

<레베데프비망록> 17·18 (≪매일신문≫ 1995년 2월 11일·14일) — 서중석 재인용1948-03-10 / 1948-03-12

"김구에게 답할 필요가 있을까."

김일성이 답합니다.

<레베데프비망록> 17·18 (≪매일신문≫ 1995년 2월 11일·14일) — 서중석 재인용1948-03-10 / 1948-03-12

"만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은 아무런 수확이 없을 것이다."

이틀 뒤, 김두봉이 확답을 재촉합니다.

김일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레베데프비망록> 17·18 (≪매일신문≫ 1995년 2월 11일·14일) — 서중석 재인용1948-03-10 / 1948-03-12

"국가적 사업은 한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서두르는가."

서울에서는 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양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초청은 어디서 왔나

1:55방송이 먼저였다

답이 온 것은 3월 말입니다. 그런데 방식이 달랐습니다.

3월 25일, 평양방송이 먼저 나갔습니다.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4월 14일 연석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는 발표였습니다.

방송이 먼저였고, 편지는 그 뒤에 도착합니다.

3월 27일, 김일성과 김두봉이 연서한 서한이 옵니다. 일자는 3월 25일.

겉봉에는 「김구·김규식 양위선생 공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서한의 내용이 초청장이 아닙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신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 서중석

"당신들은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거듭 파열시키었습니다."

질책입니다.

김구와 김규식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3월 31일, 두 사람은 「감상」을 발표합니다.

미리 다 준비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 그런 의구심을 밝히면서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만류했습니다. 그리고 실패했습니다.

4월 9일, 주한 미국 정치고문이 워싱턴으로 이렇게 보고합니다.

FRUS 1948, vol. VI, Document 7831948-04-09

"두 김씨는 모두 고집이 센 사람들이고, 이미 마음을 정했으므로 우리가 말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서울에서는 이미 다른 말이 돌고 있었습니다.

4월 15일자 현대일보 2면 제목은 이랬습니다.

「양김씨 이미 항복 — 북조선의 모략선전」

가기 전이었습니다.

뒷문

3:08일흔한 살이 서른여섯에게

4월 19일 아침, 경교장 앞이 사람으로 막혔습니다.

가지 말라고 온 청년과 학생들이었습니다.

김구는 그들을 뿌리치고 뒷문으로 나갑니다.

같은 날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연석회의가 열립니다.

46개 단체, 대표 545명.

4월 20일, 김구는 김두봉의 안내로 김일성을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단독회담을 하자고 청합니다.

일흔한 살이 서른여섯에게 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적합니다.

북의 헌법은 단독정부 수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냐고.

4월 22일, 김구가 축사를 합니다. 5분쯤이었습니다.

≪조선일보≫ 1948년 4월 22일 · ≪白凡語錄≫(思想社, 1973) 263~264쪽1948-04-22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상토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이와 같은 성대한 회합에 본인이 참석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같은 날, 기자가 그에게 묻습니다.

이 회의가 협동적이지도 평등하지도 않아 보인다고.

김구가 답합니다.

최성복, <평양 남북협상의 인상>, ≪新天地≫ 1948년 (호수 확인 중) 67쪽 — 서중석 각주 437 재인용1948

"나도 그 점이 우려되오. 아무튼 나는 남조선 단독정부-단독선거도 반대려니와, 북조선의 그것도 반대이고, 한 번에 안 되면 몇 번이고 이야기해 볼 작정이오."

단상에서는 「위대한 발전」이라 했고,

기자에게는 「나도 그 점이 우려되오」라고 했습니다.

같은 날입니다.

그의 이름이 없는 문서

4:22그의 이름이 없다

4월 23일, 회의가 끝나고 결정서가 채택됩니다.

그리고 4월 30일, 공동성명서가 나옵니다.

북측 15개, 남측 28개 단체 공동명의였습니다.

네 항목이었습니다.

하나, 외국 군대는 즉시 동시에 철거할 것.

둘, 철수 뒤에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셋, 전조선 정치회의를 거쳐 통일정부를 세운다.

넷, 남한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

두 번째 항목을 기억해 두십시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 1948년 남북협상 성명서1948-04-30

"철수 뒤에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그런데 그 문서에 김구의 이름이 없습니다.

한독당 대표로는 엄항섭이, 민족자주연맹 대표로는 송남헌이 서명했습니다.

두 사람 본인은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이 워싱턴으로 보낸 전문에 그 사정이 적혀 있습니다.

FRUS 1948, vol. VI, Document 7911948-04-30

"김구와 김규식의 조직만이 좌익이 아닌 유의미한 단체였으나, 그들은 그 단체를 대표해 서명하지 않았다. 서명한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 북으로 간 아주 작은 부분의 대표들이다."

이 회의에 온 남측에서 좌익이 아닌 쪽은 두 사람의 조직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 문서에는 그 두 사람의 이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남북 지도자의 합의」로 기억하는 그 문서입니다.

5월 5일, 두 사람은 서울로 돌아옵니다.

5월 10일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7월 11일, 경교장

5:34그는 알고 있었다

두 달이 지납니다.

7월 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되고, 7월 20일 국회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습니다.

정부가 서는 중이었습니다.

그 사이인 7월 11일 오전 열한 시,

중화민국 공사 유어만이 김구가 머물던 경교장을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말합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저는 외교관입니다만 본래 솔직한 사람입니다. 서울 부임이 제 첫 공직입니다.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으로서 이야기하러 왔습니다. 때로 선생을 언짢게 하더라도 말입니다."

김구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회담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고개만 끄덕여 고마움을 표한다.)"

유어만은 대화를 적으면서 상대의 표정까지 함께 적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서에는 김구가 무엇을 말했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가 가져온 것은 편지 세 통이었습니다.

오철성, 외교부장 왕스제, 그리고 장제스.

세 통이 같은 말을 할 것이라고 그는 미리 알려줍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이승만 박사와 협력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속담을 하나 꺼냅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형제는 집안에서 다툴 수 있으나, 그 다툼으로 바깥사람의 모욕을 불러들여서는 안 됩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저는 선생의 아들 김신을 형제로 여깁니다. 그러니 제 말을 아들이 아버지께 드리는 말로 들어주십시오. 아프더라도 말입니다."

그다음이 최후통첩입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믿고 그것을 따르실 뜻이라면 — 그러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 그렇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정치적 원수로 갈라져,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김구가 여기서 처음 입을 엽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무겁게 웃으며) 저는 무엇이 올지 줄곧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있는데,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올 것을 알았는지, 무엇을 마음에 두었는지는 문서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협력하라는 요구가 올 것을 알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가깝습니다.

유어만은 아픈 말을 이어갑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선생에게는 오랜 애국의 기록이 있습니다. 최근 평양에서 열린 그 연석회의와 관련된 활동으로, 그 기록에 손상이 갔습니다."

그리고 화북에서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공산군에 붙잡힌 조선 사람들이 목숨이 두려워 붙잡은 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더라는 이야기를 저는 압니다. '우리는 김구 선생 사람입니다. 그분이 공산주의를 위해 얼마나 일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김구가 답합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저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저를 자기들의 협력자로 여깁니다."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남쪽 정부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다만 저는 남조선 정부에 참여할 뜻이 없습니다."

이유도 밝힙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이승만 박사는, 말하자면 민주당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제가 그들과 함께 들어가면 피할 수 없는 이견이 분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저는 빠져 있는 편이 낫습니다. 더러운 정쟁에 끼는 것이 싫습니다."

여기서 민주당은 한국민주당, 한민당입니다.

이승만이 지주 세력에 붙잡혀 있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가 본 것

8:48틀린 쪽은 외교관이었다

대화가 이어지다가, 이번에는 김구가 묻습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중국이 남한 정부를 가장 먼저 승인하겠습니까?"

유어만이 답합니다. 중국과 미국과 영국이 함께 승인할 것이라고.

김구가 다시 묻습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미국이 발을 뺄 가능성은 없다고 보십니까?"

그는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이 정부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그리고 자기가 본 것을 말합니다.

회담록은 소련을 「러시아」라고 적습니다. 당대 영어권 표기 그대로입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공산 측이 앞으로 3년간 조선 적군의 증강을 멈춘다 해도, 남조선의 모든 노력으로는 지금의 적군 병력에 맞먹는 군대를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러시아는 여기에 정부가 서는 순간,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그 군대를 손쉽게 남침에 써먹을 것입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유어만이 곧바로 받아칩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러시아가 전쟁을 뜻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전쟁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득합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지금 서는 정부는 유엔의 뒷받침을 받는 주권 정부입니다. 통일을 얻어낼 발판입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그 정부가 약해 보일수록, 선생께서 실어주셔야 할 무게는 더 커야 합니다."

두 달 열흘 전, 김구의 이름이 걸린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 1948년 남북협상 성명서1948-04-30

"철수 뒤에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7월 11일,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러시아는 그 군대를 손쉽게 남침에 써먹을 것입니다."

그는 정확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본 것과, 그의 이름이 실린 문서가 반대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이 기록은 중화민국 공사가 본국에 보고하려고 적은 것입니다.

극비로 분류됐고, 선전할 목적이 없는 문서입니다.

그가 보지 못한 것

10:28그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회담록에서 김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구·유어만 회담 기록」 1948년 7월 11일1948-07-11

"머지않은 장래에 저는 모든 것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제 친구들이, 선생을 포함해서, 그것을 좋아하든 아니든."

열흘 뒤인 7월 21일,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합니다.

두 일을 인과로 잇는 근거는 없습니다. 순서가 그랬다는 것까지입니다.

7월 24일, 주한 미국 정치고문이 워싱턴으로 전문을 보냅니다.

FRUS 1948, The Far East and Australasia, vol. VI, Document 8491948-07-24

"북조선에서 헌법이 선포되고 선거가 지시된 뒤로는 김구와 김규식조차 다소 후회하는 기색이다."

회담록에서 13일 뒤입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됩니다. 세종로가 사람으로 덮였습니다.

8월 12일, 중화민국은 한국 정부를 잠정 승인하고

유어만을 대사급 외교대표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총에 맞아 숨집니다.

사흘 뒤 미 육군 정보기관이 배경 정보를 정리해 보고합니다.

그 문서는 안두희를 어느 조직의 성원이자 미군 방첩대의 정보원으로 지목합니다.

다만 문서 하단의 자체 평가란은 「대체로 사실일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미 육군이 확인한 것이 아니라, 미 육군 정보기관이 그렇게 보고받아 적은 것입니다.

평양에서 그는 정확히 보았고, 앞으로 벌어질 일도 정확히 알았습니다.

김구가 총에 맞은 것이 1949년 6월 26일입니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 1950년 6월 25일입니다.

하루가 모자란 1년이었습니다.

이 편이 딛는 사료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