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새로운 땅의 주인들
지주의 편이었다는 대통령
0:33그 말은 석 달 뒤에 뒤집혔다이승만은 지주 세력에 업혀 집권했다.
그래서 개혁도, 친일 청산도 못 했다.
우리는 대체로 그렇게 기억합니다.
이 말의 출처를 찾아보면 —
나무위키도, 후대의 해석도 아닙니다.
1949년 12월, 미 국무부 문서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한국 정부가 농지개혁을 시행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웰스 씨의 진술은, 지주들이 정부의 주요 지지 기반이라는 점에서, 대체로 맞다."
"Mr. Wells's statement that the Korean Government has done nothing to put the land reforms into effect since the land owners are among the main supporters of the Government, is substantially correct."
그러니 이 편은 통설이 근거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말은 그때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석 달 뒤, 같은 곳에서 다른 문서가 나옵니다.
오늘은 그 석 달을 따라가 봅니다.
소작지 비율 73%
1:10소작지 비율 73%먼저 그때 이 나라의 땅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1945년, 경작지의 73퍼센트가 소작지였습니다.
열 마지기 가운데 일곱 마지기가 남의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소작료는 수확의 절반 안팎이었습니다.
이 숫자도 우리가 만든 게 아닙니다.
방금 그 미 국무부 문서에 같이 적혀 있습니다.
"1945년 73퍼센트였던 소작지 비율은 1949년 12월 현재 40퍼센트다. 법이 목표로 하는 것은 10퍼센트 미만이다."
"[This law] reduces the amount of land under tenant farming in Korea to less than 10 per cent of the total cultivated land, as contrasted with 73 per cent in 1945 and 40 per cent at present."
그런데 이 문서에는 한 가지가 더 적혀 있습니다.
1949년 6월, 이승만은 이 법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1949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법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6월 21일 국회가 이를 재의결해 법이 공포됐다."
"In June, 1949, President Rhee vetoed the Land Redistribution Law and on June 21, 1949, the National Assembly overrode his veto and the law was promulgated."
통설에 딱 맞는 장면입니다.
지주 편에 선 대통령이 개혁법을 막아섰다 —
그런데 그가 무엇을 걸고 넘어졌는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무엇을 걸고 넘어졌나
2:09거부 → 수정 → 시행1949년에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에는, 숫자 두 개가 어긋나 있었습니다.
정부가 지주에게 보상하는 금액은 15할.
농민이 정부에 갚는 금액은 12할 5푼.
차액 2할 5푼을 정부가 떠안는 구조였습니다.
갓 만들어진 나라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조항이었습니다.
할이 무엇인지부터 짚고 가겠습니다.
1할은 10퍼센트입니다. 15할이면 150퍼센트.
그 땅에서 한 해 나는 곡식의 1.5배입니다.
기준은 그해 작황이 아니라 평년작입니다.
농민은 그것을 5년에 나누어 갚습니다. 한 해에 수확의 30퍼센트입니다.
그때까지 소작료는 수확의 절반 안팎이었습니다.
정리하면, 수확의 절반을 평생 바치던 땅에서, 1년 평균 작황의 150퍼센트를 5년간 갚으면 소작농이 그 땅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다시 어긋난 두 숫자로 돌아갑니다.
그가 걸고 넘어진 것은 나눠줄 것인가가 아니라, 이 재정 조항이었습니다.
국회는 재의결로 법을 확정했고, 6월 21일 공포됩니다.
그리고 1950년 3월, 법이 개정됩니다.
농민이 갚는 금액을 15할로 올려, 보상액과 같게 맞췄습니다.
어긋나 있던 두 숫자가 여기서 맞춰집니다.
실제로 시행된 것은 이 개정법입니다.
거부하고 끝난 게 아니라, 거부하고 고쳐서 시행했습니다.
석 달
3:19석 달 만에 뒤집혔다1949년 12월의 그 문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한국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The Korean Government has done nothing."
석 달 뒤인 1950년 3월 29일, 주한 미국대사 무초가 워싱턴으로 전문을 보냅니다.
"농지개혁을 시행할 조치가 통과됐다. 농림부는 이번 철에 착수할 수 있다고 말한다."
"Passage of measure to implement land reform which Ministry Agriculture says can be gotten underway this season."
같은 미 국무부 문서집 안에서, 석 달 만에 서술이 뒤집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에서, 이번 철에 착수한다로.
그 사이에 있던 일은 셋입니다.
1950년 3월 10일, 개정법 공포.
3월 25일, 시행령. 4월 28일, 시행규칙.
그리고 국회가 시행 예산을 통과시키지 않자, 대통령이 지출을 승인해 착수시킵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같이 적어야 합니다.
무초는 같은 전문에 이렇게도 썼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국 측 상대들을 가능한 한 강하게 밀어붙였다. 때로는 거의 한계점까지."
"We have all pushed Korean counterparts as strongly as possible, and almost to breaking point at times."
미국의 압박도 사실입니다.
이 편은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갈렸나
4:16되돌아오지 않았다그럼 실제로 얼마나 갈렸을까요.
이 숫자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 농무부가 1961년에 낸 보고서는 이렇게 적습니다.
"100만 에이커가 넘는다. 총 경작지의 23퍼센트. 약 150만 가구, 전체 농가의 3분의 2에 가깝다."
"Over 1 million acres … 23 percent of the total cultivated area … about 1.5 million families, nearly two-thirds of all farm households."
한국 쪽 통계는 더 보수적으로 잡습니다. 61만 3천 헥타르, 91만 8천여 호.
두 숫자의 차이는 무엇을 셈에 넣느냐에서 옵니다. 어느 쪽도 지우지 않고 둡니다.
분명한 것은 소작지 비율입니다.
1945년 73퍼센트에서, 개혁이 끝난 뒤 한 자리 수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는 비판도 함께 있습니다.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지주들이 땅을 미리 팔아버린 몫이 적지 않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한국 쪽 통계는 대상 소작지의 절반 이상이 지주의 자작 전환과 사전 방매로 빠져나갔다고 적습니다.
1980년대 연구는 이 대목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 지역 사례 연구가 쌓이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학계의 정리입니다.
다만 미리 팔았든 법으로 갈렸든, 지주가 땅을 놓았다는 결과는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지주에게 준 것은 현금이 아니라 증권이었습니다.
"그 증권에는 이자가 없었고, 지급 시점의 물가 상승에 대한 조정도 없었다."
"The bonds carried no interest and no adjustment was made for price inflation at the time of payment."
전쟁과 인플레이션을 지나며, 그 증권은 종잇조각이 됩니다.
땅을 내놓은 대가가 사실상 사라진 겁니다.
한민당은 왜 반발했나
5:39문서로 남은 반발통설의 나머지 절반을 봅니다. 지주 세력에 업혔다는 대목입니다.
업힌 것이 사실이라면, 그 세력은 이 법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다시 그 미 국무부 문서입니다.
"국회 산업위원회의 개정안은 보상을 150퍼센트에서 240퍼센트로, 상환 기간을 5년에서 8년으로 늘리려 했다."
"Amendments … submitted by the Assembly Committee on Industry … would increase the landlords’ compensation from 150 per cent to 240 per cent and extend the period of compensation from five to eight years."
지주에게 더 주고, 농민이 더 오래 갚게 하자는 안입니다.
지주의 이해를 대변한 입법 반발이, 문서로 남아 있는 겁니다.
그 개정안은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바로잡고 갑니다.
반발한 지주들이 한민당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돌지만, 순서가 반대입니다.
한민당 창당은 1945년 9월, 농지개혁법보다 3년 9개월 앞섭니다.
한민당이 이 법에 반발한 것은 사실이고, 창당 계기는 아닙니다.
틀린 근거를 대면, 맞는 이야기까지 같이 무너집니다.
북에서는 무엇을 나눠줬나
6:28소유권에서 처분권을 빼면이 대목에서 늘 같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고, 남쪽은 돈을 받고 팔았다는 겁니다.
북의 법령 원문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1946년 3월 5일, 북조선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
제5조.
"몰수한 토지 전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영원한 소유지로 양여함."
"All confiscated land shall be granted to the farmers, without compensation, as their eternal possession."
그리고 다섯 조 뒤, 제10조.
"농민에게 분여된 토지는 매매치 못하며 소작주지 못하며 저당하지 못함."
"Land distributed to farmers may not be sold, may not be rented out to tenants, and may not be mortgaged."
같은 법 안에 있는 두 조문입니다.
영원한 소유지라면서, 팔 수도 빌려줄 수도 담보로 잡힐 수도 없습니다.
소유권이라는 말에서 처분권을 빼면, 남는 것은 경작할 권리뿐입니다.
미국 문서는 그 상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공산 측의 계획은 사실상 종전의 자작농들을 국가의 소작인으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토지의 이용권뿐이었다."
"Communist program in effect made former farm owner-operators tenants of the state, with only utilization rights their land."
그리고 소작료 대신 현물세가 있었습니다.
1950년 6월 15일자 미 중앙정보국 정보보고입니다.
"쌀에 대한 세율은 수확의 27퍼센트다."
"The tax rate for rice is 27 percent of the crop."
주한 미국대사관 전문도 같은 숫자를 적습니다. 두 기관이 따로 적은 숫자입니다.
27퍼센트. 해방 전 소작료 절반에 견주면 낮아진 수치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북의 수취가 그대로였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사료가 함께 적는 것이 있습니다.
"부과 비율은 자의적이었고 법이 정한 것보다 높은 경우가 잦았다. 그리고 특별 목적의 추가 부과가 빈번했다."
"Since assessment tax percentages were arbitrary and often higher than provided by law, and since frequent additional assessments for special purpose were made…"
법정 세율 위에 반강제 매입과 헌납 운동이 얹혔다고, 정보보고는 적습니다.
남과 북의 차이는 공짜냐 아니냐가 아니었습니다.
땅을 받은 뒤에 그 땅을 제 것으로 할 수 있느냐였습니다.
1950년 여름, 점령지에서
8:04그 전제는 비어 있었다1950년 6월 25일, 북이 내려왔습니다.
석 달 사이에 남한 대부분이 점령됩니다.
점령지에서 공산 측이 서둘러 한 일 가운데 하나가 토지개혁이었습니다.
선전의 핵심이 땅이었습니다.
그해 10월 28일, 주한 미국대사관이 워싱턴으로 전문을 보냅니다.
제목이 토지개혁입니다.
"공산군이 점령한 지역은 이미 자기 땅의 등기를 가진 농민이 60퍼센트, 소작농이 40퍼센트였고, 그 소작농도 거의 전부가 자작농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Republic of Korea areas occupied by Communists included: 60 percent farmers who already held title to their land; 40 percent tenant farmers almost all of whom were in the process of becoming owner-operators."
"따라서 공산 측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남한 농민 대다수가 공산 측 토지개혁을 환영했다는 증거는 없다."
"Therefore despite Communist propaganda claims there is no evidence the Communist land reform program greeted with any enthusiasm by most of farmers in South Korea."
1950년 봄에 모를 심은 소작농은, 그 논의 주인이 되어가는 중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수확부터 첫 상환을 하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공산 측의 토지개혁은 무엇이었을까요.
"공산 측의 계획은 사실상 종전의 자작농들을 국가의 소작인으로 만들었다."
"Communist program in effect made former farm owner-operators tenants of the state, with only utilization rights their land."
대사관은 이유를 하나 더 적습니다.
"소작농의 근본 열망은 소유의 안정성이다. 공산 측 계획은 그것을 주지 않았다."
"Basic aspiration of tenant farmers is for security of tenure… Security land tenure desired by farmers not provided by Communist program."
그리고 점령지의 토지 재분배는, 실제로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공산 측이 주도한 농지 재분배는 대체로 정치적 동기에 따른 것으로, 대한민국을 강하게 지지한 사람들의 땅을 빼앗아 공산 측 동조자에게 넘기는 일이었다."
"Most of Communist-directed farm redistribution apparently politically motivated and involved dispossession strong Republic of Korea supporters in favor Communist sympathizers."
3년 뒤, 북에서 재판이 열립니다.
부주석 박헌영이 법정에 섭니다.
혐의 가운데 하나는, 전쟁이 나면 남한 인민이 봉기해 북한군을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박헌영과 측근들은 처형됐습니다.
다만 이 대목은 연구자 사이에서 갈립니다. ⚠대조
그가 실제로 그렇게 장담했다고 보는 쪽이 있고,
김일성이 패전의 책임을 씌우려고 만든 혐의로 보는 쪽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북은 남한 농민이 호응한다는 전제를 붙들고 있었고, 그 전제를 두고 부주석을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제가 비어 있었다는 것은, 미국대사관 문서가 이미 적어두었습니다.
농지개혁을 만든 사람들이 이걸 노린 것은 아닙니다.
법은 1949년에 만들어졌고, 고쳐진 것은 1950년 3월이고, 전쟁은 6월입니다.
다만 그 몇 달의 시차 위에서, 이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체제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입안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농지개혁은 그 대격전지의 천재일우의 변수였습니다.
무엇이 남았나
10:171949년 12월까지의 이야기정리해 보겠습니다.
1949년 12월, 미국 문서는 한국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그 말은 그때 맞았습니다.
이승만은 그해 6월 이 법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국회가 재의결했습니다.
그가 걸고 넘어진 것은 나눠줄 것인가가 아니라 재정 조항이었고,
1950년 3월 개정법이 그 조항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석 달 만에, 같은 미국 문서가 이번 철에 착수한다고 적습니다.
소작지 73퍼센트의 나라가, 한 자리 수로 내려갔습니다.
그 땅에서 소작을 하던 사람들이, 그 땅의 주인이 됐습니다.
지주가 받은 증권은 이자도 물가 조정도 없이 종잇조각이 됐습니다.
북에서는 무상으로 나눠준 땅을 팔지도 빌려주지도 담보로 잡히지도 못했습니다.
통설은 그를 지주의 편에 선 대통령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지주층의 경제 기반은, 그의 정부에서 해체됐습니다.
그가 개혁의 설계자였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미국이 밀어붙였고, 국회가 재의결했고, 농림부가 실무를 했습니다.
다만 지주 편에 업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1949년 12월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이 편이 딛는 사료 · 8
- 「북조선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 1946-03-05
- 농지개혁법대한민국 국회 · 1949-06-21
- FRUS 1949, The Far East and Australasia, vol. VII, part 2, Document 304극동담당 차관보 버터워스 → 국무장관 · 1949-12-16
- FRUS 1950, Korea, vol. VII, Document 17무초 대사 → 국무장관 · 1950-03-29
- CIA, Information Report — Control of Rice in North KoreaCIA · 1950-06-15
- FRUS 1950, Korea, vol. VII, Document 717드럼라이트 대리대사 → 국무장관 · 1950-10-28
- USDA ERS, South Korea's Agricultural Economy (1961)James E. Ross · Riley H. Kirby · 196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농지개혁」(집필 박기혁)박기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