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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완성된 전략 — 그람시의 진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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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로마의 한 법정.

검사가 피고인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Reading Gramsci (Kate Crehan, Duke University Press)1928-06-04

"우리는 이 두뇌가 20년간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피고인의 이름은 안토니오 그람시.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었고, 무솔리니 정권은 그를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이 그의 사상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감옥 안에서, 그는 20세기 후반 좌파 진영 전체의 전략을 뒤바꾼 개념 하나를 완성합니다.

그 개념의 이름은 "진지전(陣地戰)".

그리고 이 개념을 이해하면, 왜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식" 중 상당수가 사실은 누군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결과물인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감옥에 갇힌 사상가

0:42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이탈리아 사르데냐섬에서 태어납니다.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이후 지도자가 됩니다.

1922년,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습니다.

파시스트 정부는 반대 세력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고, 1926년 10월 31일 모든 반대 정당을 전면 불법화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람시가 체포됩니다.

1928년 6월, 재판에서 그는 20년 4개월 형을 선고받습니다.

앞서 들으신 검사의 발언 — "이 두뇌를 20년간 멈추게 해야 한다" — 은 재판 속기록 원본이 아니라 후대 학술 전기들과 1937년 당대 회고를 통해 전해지는 문구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아이러니했습니다.

감옥은 그의 몸은 가뒀지만, 그의 사고는 가두지 못했습니다.

1929년부터 1935년까지, 그람시는 감옥 안에서 노트 33권, 원고지로 약 2,848쪽에 달하는 글을 씁니다.

후대에 『옥중수고(獄中手稿)』라 불리게 되는 기록입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그는 용어를 바꿔 씁니다.

"역사적 유물론" 대신 "실천철학"이라 쓰는 식이었습니다.

1932년 형기가 12년으로 줄었지만, 오랜 수감 생활로 건강이 무너진 그는 1937년,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서 쓴 노트들이 정식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영역본이 나오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감옥에서 그렇게까지 붙잡고 있던 질문은 무엇이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 "왜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성공했는데, 서유럽에서는 실패했는가."

두 개의 전쟁 — 기동전과 진지전

2:12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국가권력을 정면으로 급습해 장악합니다.

10월혁명입니다.

그람시를 비롯한 당시 유럽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이 방식이 서유럽에서도 통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시도는 전부 실패했습니다.

그람시는 감옥에서 이 실패의 이유를 파고듭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방식에서 비유를 가져옵니다.

정면으로 국가권력을 급습하는 방식.

넓은 평야에서 벌어지는 기동전처럼, 상대의 사령부(국가권력)를 직접 타격하면 승부가 빠르게 납니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람시가 보기에 러시아의 "시민사회"가 아직 취약했기 때문입니다.

국가만 무너뜨리면 그만이었던 겁니다.

반면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의 참호전처럼, 상대가 이미 튼튼하게 진지를 구축해놓은 곳에서는 정면 돌파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람시는 서유럽 사회를 바로 이런 곳으로 봤습니다.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trans. Quintin Hoare & Geoffrey Nowell Smith, International Publishers, 1971)1929~1935

"국가가 흔들리는 순간, 시민사회의 튼튼한 구조가 즉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서구 사회에서는 국가권력을 흔든다고 해서 사회 전체가 바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학교, 언론, 교회, 노동조합, 문화단체 — 이런 "시민사회"의 촘촘한 그물이 국가를 대신해 질서를 지탱하기 때문입니다.

그람시의 결론은 이랬습니다.

"이 그물 자체를 먼저 손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그물을 손에 넣는" 장기전에 그람시는 이름을 붙입니다.

바로 진지전입니다.

상식을 지배하는 자가 이긴다 — 헤게모니

3:34

진지전이 실제로 손에 넣으려는 건 무엇일까요.

총이나 건물이 아닙니다.

그람시가 주목한 건 "헤게모니(hegemony)" — 사람들이 "이게 당연하지"라고 느끼는 감각, 즉 상식(common sense) 그 자체였습니다.

그람시는 지배 계급이 단지 경찰과 군대 같은 억압 기구만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보다 더 강력한 건, 사람들 스스로가 "이게 원래 그런 거야"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 — 즉 동의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습니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총을 겨누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그 질서를 "상식"이라고 믿게 만들면 — 그게 가장 오래가는 지배입니다.

그럼 이 헤게모니는 어디서 만들어질까요.

그람시는 그 무대를 "시민사회" 라고 불렀습니다.

국가(정치사회)와 경제생산 사이에 있는 영역 — 학교, 언론, 종교, 노동조합, 문화예술계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이 무대에서 실제로 싸우는 사람들을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 (organic intellectuals)"이라 불렀습니다.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그 계급과 함께 성장하는 지식인 — 기존 질서를 그냥 정당화하는 "전통적 지식인"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람시가 그린 진지전의 전장은 국회의사당이 아니라 교실, 신문사, 극장, 강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장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헤게모니를 쌓은 쪽이, 정치권력을 잡기 전부터 이미 "상식"을 소유하게 됩니다.

감옥 밖으로 — 신좌파의 "장정"

4:47

그람시는 1937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노트는 한동안 이탈리아어로만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전혀 다른 곳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1967년, 서독의 학생운동 지도자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는 이런 구호를 내놓습니다.

1967

"제도권을 통과하는 장정(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

정당·의회 같은 정치권력을 정면으로 급습하는 대신, 대학·언론·문화기관 같은 제도 안으로 하나씩 들어가 자리를 잡으며 장기적으로 사회를 바꾸자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람시의 진지전과 놀랍도록 닮은 발상입니다.

다만 정확히 짚어야 할 게 있습니다 — 두치케가 그람시의 이론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는 근거도, 반대로 완전히 독자적으로 이 결론에 도달했다는 근거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둘 사이의 실제 영향 관계는 불분명하다는 것만 정확한 서술입니다 — 이 영상은 어느 쪽으로도 단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1970년대 서구 학계에 그람시의 옥중수고 영역본이 퍼지면서, "제도 안에서 장기전을 벌인다"는 이 발상은 신좌파 운동의 핵심 전략 언어로 자리잡습니다.

이름이 붙다 — "문화막시즘"의 계보

5:48

그런데 여기서부터, 이 이야기는 또 다른 갈래로 흘러갑니다.

오늘날 "문화막시즘(Cultural Marxism)"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람시의 진지전과 자주 같이 언급되는 표현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둘 게 있습니다.

"문화막시즘"은 그람시 본인이 쓴 말이 아닙니다.

이 이름이 어떻게 붙었는지, 그 경위부터 짚겠습니다.

1930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하던 일군의 학자들 —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같은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나치 집권 이후 미국 등지로 망명해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이라는 흐름을 만듭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문화막시스트"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 학계에서는 이들을 "비판이론가"라고 부릅니다.

"문화막시즘"이라는 이름표가 실제로 붙은 경위를 추적해보면, 더 이전인 1970년대부터 미국의 정치운동가 린든 라루쉬(Lyndon LaRouche) 진영이 프랑크푸르트학파를 공격하는 글을 냈고, 그 소재를 이어받아 1990년대 후반 보수 싱크탱크 프리 콩그레스 재단의 폴 웨이릭과 윌리엄 린드(William S. Lind)가 이 용어를 확산시켰습니다.

정치인 팻 뷰캐넌(Pat Buchanan)은 이보다 조금 뒤, 2000년 대선 연설과 2002년 저서를 통해 이 프레임을 전국적인 정치 담론으로 넓혔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린드가 편집한 2004년 소책자는 "문화막시즘"의 계보로 루카치, 그람시, 빌헬름 라이히, 에리히 프롬, 마르쿠제, 아도르노 여섯 명을 나란히 배열합니다.

즉 이 이름표가 붙은 시점부터 이미, 프랑크푸르트학파뿐 아니라 그람시까지 같은 목록 안에 묶여 있었던 겁니다.

다만 여기서 정확히 짚어야 할 게 있습니다.

그람시의 진지전이 실재하는 이론이라는 것, 그리고 여러 좌파 운동이 실제로 제도·문화 영역을 중시해온 것 — 이 각각의 사실 자체는 개별적으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개별 사실들을 하나로 묶어 "특정 세력이 서구 문명을 무너뜨리려 장기간 조직적으로 공모해왔다"는 하나의 완결된 음모로 그려내는 서사 — 이게 바로 학계에서 극우 음모론으로 분류하는 지점입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 다수가 유대계였다는 사실이, 이 서사 안에서 종종 "그래서 특정 민족이 의도적으로 공모했다"는 반유대주의적 함의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이 다루는 건 분명합니다 — 그람시의 진지전이라는 실재 이론, 그리고 그 이론이 후대에 "문화막시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역사적 경위까지입니다.

여러 사실을 엮어 하나의 거대한 조직적 음모로 단정하는 서사는 다루지 않습니다.

개별 사실과, 그 사실들을 음모론으로 엮는 서사는 다른 층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좌파적 상식"이 그냥 "상식"처럼 보이는가

8:10

자, 이제 이 개념을 오늘로 가져와 보겠습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든, 한 가지는 관찰할 수 있습니다 — 특정 시각이 교과서·언론·대중문화 전반에 스며들면, 사람들은 그걸 "누군가의 주장"이 아니라 그냥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게 바로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의 완성형입니다.

논쟁에서 이긴 게 아니라, 애초에 논쟁거리로 보이지 않게 만든 것 — 그게 진지전의 목표였습니다.

교육 과정에서 어떤 사건을 어떤 관점으로 서술할지, 언론에서 어떤 표현을 "중립"으로 취급할지, 대중문화에서 어떤 인물을 영웅으로 그리고 어떤 인물을 악역으로 그릴지 — 이런 것들은 결코 저절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누군가 그 자리를 채워온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채널이 그동안 다뤄온 인물들 — 특히 이승만에 대한 통념적 평가도, 이 매커니즘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수십 년간 거의 고정된 틀 안에서만 반복돼왔다면, 그건 그 평가가 유일한 진실이라서가 아니라 — 그 틀을 오래 지켜온 진지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 채널이 굳이 원 사료로 돌아가 인물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상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상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묻는 것 — 그게 이 채널이 하려는 일입니다.

참호 안에서

9:22

그람시가 감옥에서 남긴 문장 중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1929~1935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 것은 아직 태어날 수 없다. 이 공백기에는 다양한 병적 현상들이 나타난다."

그람시가 감옥 안에서 본 건 총이 아니라 상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식을 누가, 어떻게,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느냐가 결국 세상을 결정한다는 걸 그는 꿰뚫어 봤습니다.

후대 학술 전기들은 검사가 "이 두뇌를 20년간 멈추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정작 멈춘 적 없는 건, 그 두뇌가 남긴 질문이었습니다 —

"지금 당신이 당연하다고 믿는 것은, 정말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에필로그

10:00

안토니오 그람시와 진지전.

르포코리아는 이 매커니즘이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대중의식의 형성에 어떻게 작동했는지, 계속 탐구해 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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