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3개월 22일 전, 한국인이 쓴 책
3개월 22일
0:201941년 8월 15일. 뉴욕의 작은 기독교 출판사에서 책 한 권이 저작권에 등록됩니다.
"Rhee (Syngman) Japan inside out. © Aug. 15, 1941; A 156184; Fleming H. Revell co., New York. 7950"
"Rhee (Syngman) Japan inside out. © Aug. 15, 1941; A 156184; Fleming H. Revell co., New York. 7950"
저자는 이승만. 제목을 옮기면 —— 『일본, 그 안을 뒤집어 보다』.
책이 말한 것은 하나였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미국을 친다.
등록된 날로부터 진주만 공습까지는, 3개월 22일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쓴 사람을, 미국은 그 뒤로도 4년을 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나
1:001899년, 스물넷의 이승만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붙잡힌 경위는 이렇습니다 —— 다른 죄수의 진술에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승만은 그해 11월에 옥수 강성형의 구초에 나서 붙잡혔다."
"Rhee was arrested in the eleventh month of that year, his name having appeared in the deposition of the prisoner Kang Song-hyong."
강성형의 사건은, 박영효를 업고 정부를 뒤엎으려 했다는 혐의였습니다.
1899년 7월, 판결이 내려집니다.
"이승만을 같은 조의 「수종이 된 자」 율에 비추어, 태 100·징역 종신에 처할 것을 선고한다."
"Rhee is sentenced, under the statute for one who followed, to one hundred strokes and penal servitude for life."
그런데 같은 판결문에, 이런 구절이 함께 적혀 있습니다.
"이승만이 강성형의 구초에 난 일은, 죄 있는 정적이 없는데 ——"
"As for Rhee's name appearing in Kang's deposition, there is no circumstance of guilt —"
죄가 될 만한 정황이 없다고 적으면서, 종신형을 선고한 것입니다.
스물넷에 종신형을 받은 사람이, 그 감옥에서 무엇을 했는지 봅니다.
1902년 10월. 그는 감옥 안에 학교를 세웁니다. 죄수들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쳤습니다.
이듬해 1월에는 옥중에 도서실을 열었습니다.
1903년 4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그는 사전을 엮습니다.
A New English-Korean Dictionary —— 영한사전입니다.
그리고 1904년 6월, 원고 하나를 씁니다. 순한글로 쓴 정치사상서, 『독립졍신』입니다.
감옥에서 그는 기독교로 돌아섭니다. 본인이 남긴 글입니다.
"내외국 사랑하는 교중 형제자매의 도우심으로 … 영혼의 길을 확실히 찾았으며"
"By the help of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of the church, at home and abroad … I found with certainty the way of the soul."
옥중학교와 도서실, 사전, 그리고 원고.
이 다섯 해가 그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세운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 조선 사람을 남의 백성이 아니라, 제 나라의 주인으로.
1904년 8월. 조칙이 내리고 옥문이 열립니다. 그는 다섯 해 만에 감옥을 나옵니다.
그가 감옥에서 얻은 눈은, 뒤에 그가 세상을 재는 잣대가 됩니다.
프린스턴에서 워싱턴으로, 그 눈으로 본 일본
2:381904년 겨울, 감옥을 나온 그는 미국으로 떠납니다.
조지워싱턴, 하버드, 그리고 프린스턴.
1910년, 그는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었습니다.
강한 나라들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어떻게 서는가 —— 그것이 그의 학문 주제였습니다.
감옥에서 품은 물음이, 학위논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워싱턴에 남습니다.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를 미국에 대한 공식 대표로 임명합니다.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공식 대표로 임명하였다."
"Syngman Rhee, 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Washington, was appointed as the official representative."
두 달 뒤, 그 사람이 책 한 권을 냅니다.
책의 논지는 하나로 모입니다. 일본은 반드시 미국을 친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않았다.
그가 본 것은 군사력만이 아니었습니다. 체제였습니다.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섬기는 나라가, 세계가 함께 설 수 있는 문명이 될 수 있는가.
그는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반일은 민족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체제에 대한 판단이었습니다.
감옥에서 그가 눈뜬 것이 미국식 민주주의였다면, 이 책은 그 반대편을 적은 것입니다.
당대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진주만 공습이 있고 넉 달 뒤, 미국의 한 교계 신문이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무서운 책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사실일까 두렵다는 말이 나온다. 태평양에서 벌어진 이 새로운 충돌이, 이 책을 입증하는 듯하다."
"It is called a terrifying book and the fear is expressed that it is only too true. The newest clash in the Pacific seems to authenticate the book."
책이 나왔을 때가 아니라, 진주만 공습이 있고 나서야 나온 말입니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4:041941년의 미국은, 새로운 전쟁에 나설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해 4월 여론조사에서, 독일·이탈리아와 싸우자는 의견은 다섯에 하나였습니다.
갤럽, 1941년 4월 — 참전 19퍼센트, 불참전 81퍼센트.
Gallup, April 1941 — 19 percent for entering the war, 81 percent against.
책이 나오기 넉 달 전의 숫자입니다. 여름이 지나도 공기는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에게 일본은 적이 아니라, 오랜 우방이었습니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합의에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묵인했습니다.
그 나라의 독자들에게, 조선 사람이 쓴 일본 경고서는 낯선 이야기였습니다.
전쟁을 부추긴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12월 7일
4:421941년 12월 7일 아침. 진주만.
넉 달 전 아무도 읽지 않던 책이, 이날 하루아침에 다시 읽히기 시작합니다.
일본은 미국을 친다 —— 그가 적어 둔 그 문장을, 진주만 공습이 증명했습니다.
그는 진주만을 콕 집어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방향을 맞혔을 뿐입니다.
그런데 워싱턴은 그를 받지 않았다
5:01여기서 통설 하나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 「미국이 그를 데려다 앉혔다」.
진주만 공습이 그의 책을 증명한 뒤, 미국은 그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공습에서 보름 뒤, 국무부는 중국 주재 대사에게 지시를 내립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에 관하여 "매우 조심스러운 조회"를 해 볼 것.
To make "very discreet inquiries" regarding the Provisional Government and Syngman Rhee.
알아본 것이지 인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듬해 국무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 어느 한국인 집단도 승인하지 않는다.
(FRUS 1942) 미국은 어느 한국인 집단도 승인할 뜻이 없으며, 그들이 국내의 한국인과 맺은 관련이 크지 않다고 본다는 취지의 회신.
The United States is not disposed to recognize any Korean group, and does not consider their connection with Koreans inside Korea to be substantial.
그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4년을 밀어냈습니다.
넉 달에 세 번, 그리고 6월 5일
5:451945년 3월.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편지를 씁니다. 유엔 창립회의에 한국 자리를 달라고.
거절당합니다.
4월에 다시 씁니다. 아르헨티나도, 시리아도, 레바논도 들어가는데 왜 한국은 안 되느냐고.
5월에는 트루먼 대통령 앞으로 올립니다.
넉 달에 세 번이었습니다.
그리고 6월 5일. 백악관으로 간 그 편지가 국무부로 넘어가고, 답장이 나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의 어느 지역에 대해서도 행정적 권한을 가진 적이 없으며, 오늘의 한국인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다. 망명 한국인 사이에서조차 그 지지는 제한적이다."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has never had administrative authority over any part of Korea nor can it be considered representative of the Korean people of today. Its following even among exile Koreans is limited."
받는 사람은 이승만 본인이었습니다.
대표로 볼 수 없다는 통보를, 대표를 자처한 그 사람 앞으로 보낸 것입니다.
같은 날, 그가 국무부로 보낸 또 한 통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 대해 기록은 이렇게만 적습니다 —— 회신하지 않음.
해방을 두 달 앞둔 시점까지도, 미국의 공식 입장은 이러했습니다.
두 달 뒤 해방이 왔습니다. 그러나 승인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그해 9월, 국무부는 귀국 자체는 막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만 조건을 붙였습니다.
"한국인들은 어떤 '임시정부'의 관리로서가 아니라 사인(私人)으로서 간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Koreans go as private individuals and not as officials of any 'provisional government.'"
대표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만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6월의 그 편지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를 실어 나른 것은 워싱턴이 아니라 도쿄였습니다.
10월 16일 오후 다섯 시, 그는 김포 비행장에 내립니다. 서른세 해 만의 귀국이었습니다.
「미국이 데려다 앉혔다」는 말은, 이 문서와 이 귀국길 앞에서 다시 검토되어야 합니다.
두 번 골치거리, 한 사람
7:15워싱턴의 정치인들에게 그는, 늘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일제 때는 독립국 승인을 독촉하는 반일주의자로,
해방 후에는 세계대전을 무릅쓰고서라도 민주주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미국을 다그치는 반공주의자로.
이승만의 생애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와 싸운 일생이었습니다.
그의 지독한 반일과 반공은, 거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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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US 1945, vol. VI, Document 765이승만 · 194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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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US 1945, vol. VI, Document 782국무부 대리장관 · 1945-09-21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dh_001_1945_10_16_0060 — 매일신보·자유신문1945-10-16
- FRUS 1952–1954, vol. XV, pt. 2, Document 808미 국무부 · 1953
- FRUS 1952–1954, vol. XV, pt. 2, Document 651이승만 · 195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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