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하와이에서 쓴 공산주의 경고 — 「공산당의 당부당」
제1장
0:18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납니다.
2월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그해 10월 레닌의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권력을 세웁니다.
계급 없는 사회로 가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곧바로 전 세계 지식인들을 흔들어놓습니다.
당시 서구의 저명한 지식인들 상당수가 이 실험을 "인류의 미래"라고 불렀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신분제와 빈부격차에 신물이 나 있던 사람들에게, "다 함께 평등하게 산다"는 구호는 거의 종교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열기 한복판에서, 다른 목소리를 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우리가 흔히 "냉전의 설계자"나 "친미 정치인"으로만 기억하는 이승만입니다.
제2장
1:00이승만은 1913년부터 하와이에서 『태평양잡지(The Korean Pacific Magazine)』를 직접 만들고 있었습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다 1921년 하와이로 돌아온 뒤에도, 그가 붙잡은 무기는 총이 아니라 활자였습니다.
1923년 3월 1일자, 다섯 번째 해 첫 호.
그리고 그 지면에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립니다.
제목부터가 도발적입니다.
"당부당" —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공산주의 전체를 찬양도, 전면 부정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주의가 오늘 인류사회에 합당한 것도 있고 합당치 않은 것도 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비교하여 이 글의 제목을 '당부당'이라 하였나니…"
"Since this doctrine has in it what is fitting for human society today and also what is not fitting, I have compared the two and titled this article 'The Right and the Wrong'…"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지면 어디에도 "이승만"이라는 서명은 인쇄돼 있지 않습니다.
다만 위스콘신대 박사논문을 비롯한 여러 학술 연구가 이 글을 이승만의 글로 분류합니다 — 그가 이 잡지를 창간해 끌고 온 사람이고, 매호 여러 편을 서명 없이 싣던 필자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상할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1923년은 소련 체제에 대한 국제적 평가가 아직 크게 엇갈리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장단점을 나눠서 보자"고 말하는 건, 지지도 반대도 아니라 — 분석을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제3장
2:13이승만은 공산당의 취지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조선의 오랜 신분제 이야기부터 꺼냅니다.
양반과 상놈으로 나뉘어 핏줄로 신분이 갈리던 시대, 그리고 사람을 사고팔던 노예 제도.
"부자는 일 아니하고 가난한 자의 노동으로 먹고살며… 월급과 삯전을 점점 깎아서 가난한 자는 호구지계를 잘 못하고 늙어 죽도록 땀 흘리며 노력하여… 이 어찌 노예 생활과 별로 다르다 하리오."
"The rich do no work and live off the labor of the poor… wages and hire are cut lower and lower until the poor can scarcely keep themselves alive, sweating and laboring until they grow old and die… how is this so different from the life of a slave?"
신분제는 법으로 없어졌지만, 그 자리를 빈부 격차가 대신 차지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평등을 만들자는 주의는 대저 옳으니, 이는 적당한 것이라 하겠고…"
"The doctrine of making men equal is on the whole right; this may be called fitting…"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게 있습니다.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이기 이전에, 평등 자체를 반대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문제 삼은 건 "평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 그 방법론이었습니다.
제4장
3:06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이 글의 진짜 핵심입니다.
이승만은 공산당의 방법론을 다섯 가지로 쪼개서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첫째, 재산을 강제로 나누면 어떻게 되는가.
"게으른 사람들이 농사를 아니하든지 일을 아니하든지 하여 토지를 다 버리게 되면 어찌하겠느뇨…"
"If idle men will not farm and will not work, and the land is left abandoned — what then?"
노력과 결과가 분리되면, 노력할 이유도 함께 사라진다는 지적입니다.
둘째, 자본가를 없애면 어떻게 되는가.
"재정가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되기 어려우리니…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
"If competition among financiers disappears, commerce and industry can hardly develop… material civilization will come to a halt."
미워할 대상을 없애는 것과, 그 대상이 하던 일을 대신할 사람을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셋째, 지식계급을 없애면 어떻게 되는가.
"지식 계급을 없이 하자 함은 불가하며…"
"To propose doing away with the educated class is not permissible…"
지식을 가진 자를 적으로 돌리는 순간, 사회 전체의 수준이 함께 무너진다는 경고입니다.
넷째, 종교를 없애면 어떻게 되는가.
"교회 조직을 없이 하는 날은 인류덕의상 손해가 다대할 것이며…"
"On the day church organization is done away with, the loss to human morality will be very great…"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붙잡아주는 규범의 문제로 본 겁니다.
그리고 다섯째, 가장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정부와 군사, 국가를 없애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러시아로만 보아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다 아는 바라…"
"Look only at Russia, which now professes the communist party: they themselves know full well that without a government, without leaders, and without an army they cannot subsist…"
이 다섯째 항목이 사실상 이 글 전체의 결론입니다.
"국가를 없애고 한 나라만 믿으라"는 방식이 결국 어떤 자기모순에 부딪히는지, 그는 이미 짚어내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이 이 글을 쓴 지 68년 뒤, 소련은 실제로 무너졌습니다.
그가 붕괴 시점까지 예언한 건 아니지만, 그가 짚어낸 근본적인 결함은 68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 글을, 자기 나라 이야기로 끝맺습니다.
"우리 한족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다 공산당 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이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
"For our Korean people the most urgent, the most vital, the greatest thing is the work of national restoration. If communism can help that work, we would not hesitate to all become communists; but if it would hinder it, we can never give it our approval."
이념보다 독립이 먼저라는 겁니다.
그에게 공산주의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아니라,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로 저울질할 대상이었습니다.
제5장
5:13이 채널에서 앞서 다룬 『Japan Inside Out』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 글에서 이승만은 일본의 신정전체주의(神政全體主義) — 천황을 신으로 떠받드는 체제가 결국 태평양전쟁으로 폭주할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 22일 뒤, 진주만이 터졌습니다.
「공산당의 당부당」은 그 안목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일본이든 소련이든, 이승만이 실제로 경계한 건 "이념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판단을 지워버리고 하나의 체제·하나의 믿음에 전부를 걸게 만드는 전체주의적 구조 — 그게 그의 진짜 표적이었습니다.
신정전체주의를 꿰뚫어 본 눈과, 공산 전체주의를 꿰뚫어 본 눈은 같은 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 옳았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은, 그로부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글이 나온 지 8년 뒤인 1931년, 세계적인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을 만납니다.
그리고 2년 뒤, 소련을 다녀온 다른 방문자 스무 명과 함께 이런 공개서한에 서명합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들에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언론이 '뉴스 가치가 없다'며 무시하는 그런 경제적 노예제도와 궁핍과 실업과 개선에 대한 냉소적 절망의 증거를, 소련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음을 기록하고자 한다."
"We desire to record that we saw nowhere evidence of such economic slavery, privation, unemployment and cynical despair of betterment as are accepted as inevitable and ignored by the press as having 'no news value' in our own countries."
이승만이 활자로 경고했던 바로 그 함정에, 서구 최고의 지식인 중 한 명이 직접 걸어 들어간 겁니다.
스탈린은 이런 방식으로 외국 지식인들을 초청해 대접하며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하와이의 잡지사에 앉아서, 그 함정을 미리 글로 그려낸 셈입니다.
당대 지식인 대다수가 "혁명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에 취해 있을 때, 그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오랫동안 "시대에 뒤떨어진 반공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68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읽으면, 이 글은 뒤떨어진 게 아니라 너무 일찍 도착한 경고였습니다.
에필로그
6:581923년 하와이의 작은 잡지에 실렸던 한 편의 글.
「공산당의 당부당」.
다음 편에서는, 이승만이 이 안목을 실제 정치의 선택으로 옮기는 과정을 다루겠습니다.
이 영상이 쓴 사료 · 5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