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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이전에 당대 지성이었던 이승만, 감옥에서 시작된 학문

두 번의 적중

0:01

이승만.

이 이름을 들으면 대개 두 가지 이미지 중 하나가 떠오릅니다.

건국 대통령, 아니면 권력에 집착한 독재자.

찬양이든 비난이든, 결론은 정치인 이승만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그 결론이 통째로 놓치는 게 하나 있습니다.

1923년, 그가 창간한 하와이의 작은 한인 잡지에 글 한 편이 실립니다.

소련 체제가 어디서 무너질 것인지를 조목조목 짚어낸 글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영국 최고의 지식인들은 정반대의 글을 씁니다.

1941년 8월, 그는 뉴욕에서 책 한 권을 냅니다.

핵심 주장은 하나였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미국을 친다.

그 책이 저작권에 등록되고 3개월 22일 뒤에, 진주만 공습이 일어납니다.

공산주의가 어디서 무너질지, 일본이 어디로 갈지.

그는 두 위험을 모두 미리 짚었고, 두 번 다 맞혔습니다.

그런데 이런 걸 두고 흔히 「예언」이라고 부릅니다.

이 채널은 그렇게 부르지 않겠습니다.

예언은 설명할 게 없지만, 분석은 어디서 왔는지 되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치인 이승만이 아니라, 학자 이승만을 봅니다.

그리고 그 학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따라가면, 뜻밖의 장소에 닿습니다.

감옥입니다.

감옥에서 시작된 학문

1:07

1899년.

스물넷의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갇힙니다.

붙잡힌 경위는 이렇습니다.

다른 죄수의 진술에 이름이 나왔습니다.

1899년 7월 27일 재가 판결 (최정식·이승만)1899-07-27

"이승만은 그해 11월에 옥수 강성형의 구초에 나서 붙잡혔다."

강성형의 사건은, 박영효를 업고 정부를 뒤엎으려 했다는 혐의였습니다.

1899년 7월, 판결이 내려집니다.

1899년 7월 27일 재가 판결 (최정식·이승만)1899-07-27

"이승만을 같은 조의 「수종이 된 자」 율에 비추어, 태 100·징역 종신에 처할 것을 선고한다."

그런데 같은 판결문에, 이런 구절이 함께 적혀 있습니다.

1899년 7월 27일 재가 판결 (최정식·이승만)1899-07-27

"이승만이 강성형의 구초에 난 일은, 죄 있는 정적이 없는데 —"

죄가 될 만한 정황이 없다고 적으면서, 종신형을 선고한 것입니다.

널리 회자되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됐다」는 이야기는 1차 기록에 없습니다.

확인되는 선고는 태 100대와 종신징역, 이것뿐입니다.

회자되는 것과 기록된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스물넷에 종신형을 받은 사람이, 그 감옥에서 무엇을 했는지 봅니다.

1902년 10월, 그는 감옥 안에 학교를 세웁니다.

죄수들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쳤습니다.

이듬해 1월에는 옥중에 도서실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1903년 4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그는 사전을 엮습니다.

『A New English-Korean Dictionary』.

영어 표제어를 한국어로 풀이하는 영한사전입니다.

여기서 정확히 해두겠습니다.

이 사전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A에서 F까지 쓰고 멈췄습니다.

그 자필 원고는 지금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에 남아 있습니다.

미완의 원고를 굳이 짚는 이유가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무엇을 하려던 사람인지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사전은 한 사람이 읽으려고 만드는 물건이 아닙니다.

뒤에 올 사람들이 영어로 된 세계를 읽게 하려고 만드는 물건입니다.

사전을 멈춘 이유는 다른 원고 때문이었습니다.

1904년 6월, 그는 같은 감옥에서 순한글 정치사상서 한 권을 씁니다.

『독립졍신』입니다.

그리고 이 원고가 책이 된 것은 곧바로가 아니었습니다.

탈고로부터 6년이 지난 1910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동신서관에서 처음 인쇄됩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 안에만 말을 가둬두지 않았습니다.

옥중에서 『제국신문』에 무기명 논설을 보냅니다.

갇힌 사람이 담장 밖의 독자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독립졍신』이 왜 순한글이었는지도 같이 봐야 합니다.

당시 지식인의 글은 한문이 기본이었습니다.

한문으로 쓰면 배운 사람들이 읽고, 한글로 쓰면 그 바깥의 사람들이 읽습니다.

순한글을 택했다는 것은 읽을 사람을 누구로 잡았는지를 말해줍니다.

사전도, 신문 논설도, 순한글 원고도 방향이 같습니다.

전부 자기가 아는 것을 남이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일입니다.

옥중학교와 도서실, 사전, 신문 논설, 그리고 원고.

이 다섯 해가 그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세운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조선 사람을 남의 백성이 아니라, 제 나라의 주인으로.

1904년 8월, 조칙이 내리고 옥문이 열립니다.

그는 다섯 해 만에 감옥을 나옵니다.

여기서 이 채널의 관점을 밝혀 두겠습니다.

구한말의 젊은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하나의 이름으로 뭉뚱그려져 왔습니다.

개화파, 그리고 그 뒤에 붙은 친일이라는 딱지.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그 딱지 아래에서 거의 읽히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그 세대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감옥을 학교로 바꾼 이 다섯 해가, 그 세대 안에서도 그를 유독 도드라지게 만듭니다.

감옥을 나온 그해 겨울, 그는 미국으로 떠납니다.

감옥에서 품은 물음을 들고서였습니다.

학위 뒤에 숨겨둔 목적

4:16

1907년 조지워싱턴대 학사, 1908년 하버드 석사, 그리고 1910년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서른다섯의 나이였습니다.

미국 대학에서 Ph.D.를 받은 최초의 조선인이 이승만입니다.

그의 박사논문 제목은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우리말로 옮기면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입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부터 남북전쟁기까지, 중립국의 권리와 자유통상의 원칙이 어떻게 확립돼왔는지를 다룬 논문입니다.

목차를 펼쳐 보면 이 논문이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1장은 1776년 이전 중립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1장 아래에 붙은 항목들이 이렇습니다.

중립 통상의 자유.

화물과 선박의 소유권.

전시 금제품의 범위.

봉쇄.

임검과 수색의 권리.

그리고 중립국의 관할권.

이어지는 2장은 1776년부터 1793년까지, 유럽 열강이 그 시기에 실제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다룹니다.

전부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묻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전쟁에 끼지 않은 나라의 배와 화물과 영토를 누가 어디까지 건드릴 수 있는가.

1910년의 조선을 생각하면, 이것이 무슨 질문인지 분명해집니다.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1910년에 나라를 잃은 쪽에서 보면, 약한 나라의 권리가 국제법의 원칙으로 인정받는가 하는 문제는 학문의 주제이기 이전에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논문의 결말은 이렇습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1912

"유럽의 해양 강대국들이 제기한 모든 반대에도, 미국은 자유주의적 견해를 끈질기게 옹호함으로써 이 성취들에 세계 어느 나라보다 큰 몫의 영향을 보탰다."

여기서 말하는 성취란 전시 중립법의 발전, 전쟁 중 평화적 국가 간 교류의 보장, 그리고 중립국 통상의 자유를 넓히고 지켜낸 일입니다.

그는 논문 본문에서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존 W. 포스터의 평가를 인용합니다.

Foster 인용1912

"미국은 정치적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때부터 자유통상과 진실하고 진정한 중립의 옹호자가 되었고, 이 원칙들을 인정받게 하는 데 세계 어느 나라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논문이 정확히 무엇을 다루는지는 사료 그대로입니다.

학위논문이고, 국제법의 한 갈래를 다룬 학술 저작입니다.

다만 이 채널은 이 논문을 쓴 목적 자체를, 학문적 완성이 아니라 조선 독립의 지성적 토대를 놓기 위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이유는 논문의 주제 그 자체에 있습니다.

그가 붙잡은 물음은 이것입니다.

강한 나라들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어떻게 서는가.

약소국과 중립국의 권리가, 강대국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국제법의 원칙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가.

1910년에 이 물음을 붙잡고 있던 조선 사람에게, 그것이 남의 나라 이야기였을 리 없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품은 물음이 학위논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19년 9월 11일, 세 임시정부의 통합 뒤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이승만의 당선이 선포됩니다.

논문을 쓴 지 9년 뒤입니다.

그가 평생 택한 외교노선은 정확히 이 논문이 다룬 그 원칙이었습니다.

국제법과 여론에 호소해 강대국을 움직인다는 것.

이론을 몰랐던 게 아닙니다.

그 원칙을 직접 연구하고 정리한 사람이, 그 이론을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써먹으려 한 겁니다.

그러면 그 학문은 실제로 얼마나 정확했을까요.

답은 13년 뒤, 하와이에서 나옵니다.

서구 지성이 놓친 것

7:18

1913년 9월, 하와이.

이승만은 『태평양잡지(The Korean Pacific Magazine)』를 창간하고 초대 발행인 겸 주필을 맡습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다 1921년 하와이로 돌아온 뒤에도, 그가 붙잡은 무기는 총이 아니라 활자였습니다.

1923년 3월 1일자, 다섯 번째 해 첫 호.

그 지면에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립니다.

제목부터가 도발적입니다.

당부당 —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공산주의 전체를 찬양도, 전면 부정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공산당의 당부당1923-03

"그 주의가 오늘 인류사회에 합당한 것도 있고 합당치 않은 것도 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비교하여 이 글의 제목을 '당부당'이라 하였나니…"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지면 어디에도 「이승만」이라는 서명은 인쇄돼 있지 않습니다.

1923년 3월호의 편집인도 그가 아니라 김영우였습니다.

다만 여러 학술 연구가 이 글을 이승만의 글로 분류합니다.

그가 이 잡지를 창간해 끌고 온 사람이고, 매호 여러 편을 서명 없이 싣던 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923년이 어떤 해였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납니다.

2월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그해 10월 레닌의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권력을 세웁니다.

계급 없는 사회로 가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곧바로 전 세계 지식인들을 흔들어놓습니다.

당시 서구의 저명한 지식인들 상당수가 이 실험을 「인류의 미래」라고 불렀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신분제와 빈부격차에 신물이 나 있던 사람들에게 「다 함께 평등하게 산다」는 구호는 거의 종교처럼 들렸습니다.

여기에 조선만의 사정이 하나 더 겹칩니다.

나라를 빼앗긴 쪽에서 보면, 제국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세력이 세계 한복판에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독립을 도와줄 힘이 거기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붙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1923년에 「소련을 조심하라」고 쓰는 것은, 시대의 공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그 열기 한복판에서, 이승만은 공산당의 취지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조선의 오랜 신분제 이야기부터 꺼냅니다.

공산당의 당부당1923-03

"부자는 일 아니하고 가난한 자의 노동으로 먹고살며… 월급과 삯전을 점점 깎아서 가난한 자는 호구지계를 잘 못하고 늙어 죽도록 땀 흘리며 노력하여… 이 어찌 노예 생활과 별로 다르다 하리오."

신분제는 법으로 없어졌지만, 그 자리를 빈부 격차가 대신 차지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공산당의 당부당1923-03

"평등을 만들자는 주의는 대저 옳으니, 이는 적당한 것이라 하겠고…"

눈여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이승만은 반공주의자이기 이전에, 평등 자체를 반대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문제 삼은 건 「평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그 방법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이 글의 진짜 핵심입니다.

그는 공산당의 방법론을 다섯 가지로 쪼개서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첫째, 재산을 강제로 나누면 어떻게 되는가.

공산당의 당부당1923-03

"게으른 사람들이 농사를 아니하든지 일을 아니하든지 하여 토지를 다 버리게 되면 어찌하겠느뇨…"

노력과 결과가 분리되면, 노력할 이유도 함께 사라진다는 지적입니다.

둘째, 자본가를 없애면 어떻게 되는가.

공산당의 당부당1923-03

"재정가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되기 어려우리니…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

미워할 대상을 없애는 것과, 그 대상이 하던 일을 대신할 사람을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셋째, 지식계급을 없애면 어떻게 되는가.

공산당의 당부당1923-03

"지식 계급을 없이 하자 함은 불가하며…"

지식을 가진 자를 적으로 돌리는 순간, 사회 전체의 수준이 함께 무너진다는 경고입니다.

넷째, 종교를 없애면 어떻게 되는가.

공산당의 당부당1923-03

"교회 조직을 없이 하는 날은 인류덕의상 손해가 다대할 것이며…"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붙잡아주는 규범의 문제로 본 겁니다.

그리고 다섯째, 가장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정부와 군사, 국가를 없애면 어떻게 되는가.

공산당의 당부당1923-03

"지금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러시아로만 보아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는 사정을 자기들도 다 아는 바라…"

이 다섯째 항목이 사실상 이 글 전체의 결론입니다.

국가를 없애자면서 실제로는 하나의 국가에 전부를 걸게 만드는 자기모순을, 그는 이미 짚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 글을, 자기 나라 이야기로 끝맺습니다.

공산당의 당부당1923-03

"우리 한족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다 공산당 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이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

이념보다 독립이 먼저라는 겁니다.

그에게 공산주의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아니라, 조선의 독립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로 저울질할 대상이었습니다.

이 글이 얼마나 이른 것이었는지는, 10년 뒤에 드러납니다.

1931년, 세계적인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을 만납니다.

그리고 2년 뒤, 소련을 다녀온 다른 방문자 스무 명과 함께 맨체스터 가디언에 공개서한을 싣습니다.

소련의 사회 상황1933-03-02

"우리는, 우리 나라들에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언론이 '뉴스 가치가 없다'며 무시하는 그런 경제적 노예제도와 궁핍과 실업과 개선에 대한 냉소적 절망의 증거를, 소련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음을 기록하고자 한다."

이승만이 활자로 경고했던 바로 그 함정에, 서구 최고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 직접 걸어 들어간 겁니다.

그는 하와이의 작은 잡지사에 앉아, 그 함정을 10년 먼저 글로 그려 놓았습니다.

감상이 아니라 분석의 결과였습니다.

이게 우연이었을까요.

18년 뒤, 그는 다시 한 번 같은 정확도로 시대를 읽어냅니다.

이번엔 소련이 아니라 일본이었습니다.

3개월 22일 전

12:38

1941년 8월 15일.

뉴욕의 한 기독교 출판사에서 책 한 권이 저작권에 등록됩니다.

저자는 이승만.

제목을 옮기면 『일본, 그 안을 뒤집어 보다』입니다.

책이 말한 것은 하나였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미국을 친다.

등록된 날로부터 진주만 공습까지는, 3개월 22일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함께 봐야 합니다.

책이 나오기 두 달 전인 1941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를 미국에 대한 공식 대표로 임명합니다.

Japan Inside Out1941-08-15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공식 대표로 임명하였다."

무명의 망명객이 쓴 괴문서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임시정부가 대미 창구로 세운 사람이, 그 자격으로 미국 독자에게 내놓은 경고였습니다.

그가 본 것은 군사력만이 아니었습니다.

체제였습니다.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섬기는 나라가, 세계가 함께 설 수 있는 문명이 될 수 있는가.

그는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반일은 민족감정만이 아니었습니다.

체제에 대한 판단이었습니다.

감옥에서 그가 눈뜬 것이 미국식 민주주의였다면, 이 책은 그 반대편을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나왔을 때 거의 읽히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보면 그가 얼마나 외로운 자리에 서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1941년의 미국은, 새로운 전쟁에 나설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해 4월 갤럽 조사에서, 독일·이탈리아와 싸우자는 의견은 열에 둘이었습니다.

찬성 19퍼센트, 반대 81퍼센트.

책이 나오기 넉 달 전의 숫자입니다.

여름이 지나도 공기는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에게 일본은 적이 아니라, 오랜 우방이었습니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합의에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묵인했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고 일본이 조선을 갖는다는 양해였습니다.

그러니 미국 독자에게 이 책은 이중으로 낯선 물건이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나라에서 전쟁이 온다고 말하는 책이었고, 우방으로 여기는 나라를 위험하다고 말하는 책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것을 쓴 사람은, 미국이 그 지배를 묵인해 준 바로 그 나라 사람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진주만.

넉 달 전 아무도 읽지 않던 책이, 이날 하루아침에 다시 읽히기 시작합니다.

진주만 공습이 있고 넉 달 뒤, 미국의 한 교계 신문이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Japan Inside Out1941-08-15

"무서운 책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사실일까 두렵다는 말이 나온다. 태평양에서 벌어진 이 새로운 충돌이, 이 책을 입증하는 듯하다."

책이 나왔을 때가 아니라, 진주만 공습이 있고 나서야 나온 말입니다.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그는 진주만을 콕 집어 말하지 않았습니다.

방향을 맞혔을 뿐입니다.

이 채널은 그것을 예언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에필로그

15:04

1899년, 감옥에서 사전을 만들기 시작한 스물넷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1910년, 강한 나라들 사이에서 약한 나라가 어떻게 서는지를 논문으로 썼습니다.

1923년, 서구 지성이 놓친 것을 하와이에서 짚어냈습니다.

1941년, 다시 한 번 같은 정확도로 시대를 읽었습니다.

네 개의 장면은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읽은 결과입니다.

그 방식이란 이런 것입니다.

체제가 무엇을 약속하는지가 아니라, 그 체제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본다.

소련은 평등을 약속했습니다.

그는 그 약속 대신, 재산과 자본과 지식과 종교와 국가를 없앤 자리에 무엇이 들어서는지를 따졌습니다.

일본은 대동아의 질서를 약속했습니다.

그는 그 약속 대신, 사람을 신으로 세운 체제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따졌습니다.

같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그는 감옥에서 배웠습니다.

사전을 만들고, 신문에 글을 보내고, 순한글로 원고를 쓰던 다섯 해 동안 그가 익힌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다루는 태도였습니다.

구한말의 젊은 선각자들은 오랫동안 하나의 딱지 아래 묶여 왔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거의 읽히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그 세대의 한 사람이었고, 그 세대 안에서도 두드러진 지성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시대를 읽은 학자였고, 그 학문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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