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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김구는 원래 적이었다 — 청계동, 두 갈래 길

오프닝 훅

0:01

1919년, 윤치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윤치호 일기1919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오히려 한일병합을 앞당겼다."

동의하기 쉬운 문장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채널은 이 문장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윤치호의 평가는 어디까지 사실에 닿아 있었을까요.

청계동, 두 소년

0:20

이야기는 이토 저격보다 15년 앞섭니다.

1894년, 조선 전역에서 동학농민군이 일어났습니다.

황해도 신천의 진사 안태훈은 포수와 장정 70여 명을 모아 청계산에 진을 치고 이들과 맞섰습니다.

그 대열에는 열여섯 살 아들도 있었습니다 — 안중근입니다.

안중근은 훗날 옥중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역사』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안응칠역사1910 (기술 시점) / 1894 (사건 시점)

"정병 40명이 출발할 때, 나는 동지 6명과 함께 자원해 선봉과 정탐을 맡았고, 일곱 명이 적진에 기습 사격을 가했다."

소년 안중근은 구경꾼이 아니라 실전 참가자였습니다.

안중근은 동학을 어떻게 기억했을까요.

자서전 『안응칠역사』에 그가 남긴 말은 냉정합니다.

안응칠역사1910 (기술 시점) / 1894 (사건 시점)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질러 다니며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그리고 훗날 뤼순 감옥에서 미완으로 남긴 유고 『동양평화론』「전감」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동양평화론1910 (미완성 유고)

"지난 갑오년, 조선의 쥐 같은 도적배(鼠竊輩)인 동학당의 소요를 계기로, 청·일 양국이 군사를 움직여 건너와 전쟁을 시작했다."

안중근에게 동학은, 청·일 양국의 출병과 전쟁으로 이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같은 전장의 반대편

1:33

같은 전장의 반대편 진영에는 또 다른 소년이 있었습니다.

황해도 팔봉접주, 열아홉 살 김구입니다.

김구 자신이 남긴 회고록 『백범일지』에 따르면, 그의 부대는 이동엽 부대의 습격을 받아 흩어졌습니다.

쫓기던 그에게 뜻밖의 손이 뻗어왔습니다 — 안태훈이 보낸 밀사였습니다.

백범일지(독립기념관 전기 인용)1894~1895 (사건 시점)

"안 진사가 그때 밀사를 보냈던 진의는 나의 재기를 아끼는 데 있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안태훈은 그와 가족에게 청계동에 거처를 마련해주었고, 김구는 그곳에서 넉 달 남짓 유학자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토벌에 나섰던 이의 아버지가, 토벌당하던 소년을 거둔 것입니다.

15년 후, 하얼빈

2:10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이후 검찰 신문에서 그는 이토를 죽인 이유로 15개 죄목을 열거했습니다 — 명성황후 시해, 을사조약, 고종 폐위, 군대 해산, 의병·양민 살해 등이 포함됐습니다.

안응칠역사1910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로써 이토를 공격했고, 전쟁 중 포로로 대우받아야 한다."

개인적 살인이 아니라 전쟁 중의 교전 행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방침은 이미 있었다

2:41

그런데 사실 하나를 먼저 짚어야 합니다.

일본의 한국 병합 방침은, 안중근의 의거보다 석 달 앞서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1909년 4월 10일, 총리 가쓰라 다로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가 휴양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병합 방침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이었던 구라치 데쓰기치는 1939년 구술 회고 『한국병합의 경위』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한국병합의 경위1939 (구술 회고, 사건 시점 1909-04-10)

"이토 공은 즉시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명언했다."

석 달 뒤인 7월 6일, 일본 내각은 「한국병합에 관한 건」을 정식으로 각의 결정했습니다.

이토가 죽기 전, 병합은 이미 국가 방침이었습니다.

시간적 연쇄 (2~3분) — 이 편의 핵심

3:20

그렇다면 윤치호가 "병합을 앞당겼다"고 쓴 건 어디까지 사실일까요.

병합 방침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토 자신도 1909년 4월 그 방침에 동의했습니다.

다만 이토는 병합 뒤 통치 방식에서는 강경파와 다른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토 암살 뒤, 일본 안에서는 병합론과 합방청원이 공론장에 드러났습니다.

건강이 악화된 소네 아라스케는 1910년 5월 사임했고,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을 겸임하며 병합 실행을 맡았습니다.

이 인사 교체를 암살의 직접 결과라고 단정할 사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것은 시간적 연쇄입니다 — 암살 뒤 열 달 안에 병합이 실행됐고, 그 과정의 주도권은 데라우치에게 넘어갔습니다.

1910년 8월 22일, 병합조약이 조인됐습니다.

29일 공포와 함께 발효됐습니다.

안중근은 동학 소요가 청·일 양국의 출병과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기록했습니다.

15년 뒤 그의 의거 역시, 이미 병합 방침을 세운 일본 정치권에 이용될 수 있는 사건이 됐습니다.

두 사건의 원인과 책임이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의도와 결과가 어긋날 수 있다는 구조적 유사성은 남습니다.

이것은 안중근 자신의 자각이 아니라, 이 채널의 해석입니다.

윤치호의 시선

4:27

윤치호는 감정이 아니라 결과로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무장투쟁론 전체에 대해 남긴 평가도 같은 결입니다.

윤치호 일기미상 (윤치호 2편에서 확보된 인용, 날짜 재확인 필요)

"아무런 실력을 갖추지 않고 무조건 돌격하라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죽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윤치호는 결과의 시간적 연쇄를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안중근의 저격이 병합을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의거 뒤 열 달 안에 병합이 실행된 시간적 근접성은, 윤치호가 그렇게 평가한 배경을 설명해줍니다.

저격이 병합의 실제 시기를 앞당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병합을 이미 결정해 둔 강경파에게, 이 사건이 실행을 밀어붙일 명분에 힘을 실어줬을 거라는 추정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을 오늘날의 일본 사학계가 있는 그대로 다루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이것은 사료가 아니라 이 채널의 추정입니다.

두 갈래 길, 그리고 마무리

5:16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뤼순에서 순국했습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계동에서 거둬 보호했던 소년 김구는,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한때 토벌하는 편과 토벌당하는 편으로 갈렸던 두 집안의 인연이, 결국 같은 이름 — 독립운동가 — 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이 편은 안중근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스스로 동학을 두고 남긴 기록을 잣대 삼아, 그 자신의 거사가 놓인 자리를 다시 비춰본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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