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코리아
영상 12KIa-_USikQY

정읍발언 — 분단의 원흉이라 불리는 그 말, 순서를 다시 본다

티저

0:01

1946년, 한 사람의 발언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낙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가 그 말을 꺼내기 넉 달 전, 이미 38선 이북에는 정부라고 불러도 될 만한 것이 서 있었습니다.

토지를 나누고, 법령을 공포하고, 행정을 집행하는 조직이었습니다.

통일정부가 막히던 날들

0:19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발표됩니다.

"당분간 강대국이 한반도를 대신 관리하겠다"는 이 방침에 좌우 모두 들끓었고, 이듬해 1월엔 좌익이 태도를 바꿔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좌우 대립은 더 깊어집니다.

그 갈등을 풀 유일한 창구는 미소공동위원회였습니다.

1946년 3월 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국과 소련이 마주 앉아 통일 임시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회담은 넉 달을 못 채우고 무너집니다.

1946년 5월 6일, 회담 참여 자격을 둘러싼 이견으로 무기한 휴회.

통일정부로 가는 협상은 당장 멈춰 섰습니다.

목포에서 정읍까지 — 1946년 5월~6월

0:59

협상이 멈추고 이틀 뒤인 5월 8일, 삼남 지방을 순회하던 이승만은 전남 목포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엽니다.

당시 좌익 성향 신문이던 청년해방일보는 5월 30일자에서 이 발언의 취지를 단독정부 수립과 무력통일 쪽으로 전했다고, 훗날 정병준과 이은선의 연구가 정리합니다.

다만 이 신문의 원지면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이승만이 그 자리에서 정확히 어떤 문장으로 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확인되는 건 "그런 취지의 보도가 있었다"는 사실까지입니다.

그래도 짚을 지점은 있습니다.

우리가 "정읍발언"이라 부르며 이승만 단독정부론의 시작점처럼 기억하는 그 말은, 사실 이승만이 그 시기에 한 유일한 발언이 아니었습니다.

협상이 무기한 휴회한 지 정확히 이틀 만에, 목포에서 이미 비슷한 취지의 말을 먼저 꺼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26일이 지난 6월 3일, 이승만은 전북 정읍의 한 강연회 자리에 섭니다.

이틀 뒤 자유신문은 그 연설의 요지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정읍 발언)과 한국 민주당의 성명1946-06-05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자유신문 1946년 6월 5일자, 「대표적 민족통일 기관을, 이승만 박사 정읍서 중대 강연」 — 이게 우리가 오늘날 "정읍발언"이라고 부르는 발언의 근거입니다.

신문도 이를 연설 "전문"이 아니라 "요지"라고 밝혔습니다.

목포와 정읍, 채 한 달이 안 되는 사이에 두 번, 이승만은 비슷한 취지의 말을 거듭한 셈입니다.

주목할 지점은 순서입니다.

통일정부를 먼저 포기한 게 아니라, 통일정부 시도가 무기한 휴회로 막힌 뒤에 나온 말이라는 겁니다 — 그것도 두 번.

그런데, 그 시각 38선 이북은

2:44

이승만이 정읍에서 이 말을 꺼내기 훨씬 전부터, 38선 이북에서는 이미 다른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며 북한 지역에 진주합니다.

9월 19일에는 소련군 대위 신분의 김일성이 소련 군함을 타고 원산항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하루 뒤인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 주둔 소련군에 훈령을 내립니다.

신편한국사 — 북한주둔 소련군 훈령1945-09-20

"북한 지역에 소비에트 권력기관을 세우지 말고, 반일·민주 정당들의 광범위한 연합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권력 수립을 지원하라."

이 훈령은 1993년 한·소 수교 이후에야 원문이 공개됐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연립정부를 지원하라"는 온건한 문구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그 문구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한 달도 안 된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됩니다.

남한의 조선공산당과 조직이 분리되는 첫 단계입니다.

11월에는 민족주의 계열 조만식을 대표로 내세운 북조선 5도 행정국이 출범합니다.

하지만 그해 12월, 조만식이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소련과 충돌하고, 이후 정치적으로 배제됩니다.

그리고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회의를 열고, 다음 날인 2월 9일 위원 선출을 마칩니다.

입법과 행정 기능을 함께 갖춘, 사실상의 정부였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3월, 이 위원회는 토지개혁 법령을 직접 공포하고 집행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방만이라도"라는 말을 꺼낸 6월 3일 기준으로, 북한은 이미 넉 달 전에 정부 기능을 하는 조직을 세웠고, 석 달 전에 토지개혁 법령을 공포·집행한 상태였습니다.

누가, 무엇을 먼저 시작했나

4:17

정읍발언이 남한 단독정부 구상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중요한 발언인 것은 맞습니다.

정읍에서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를"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사람은 이승만입니다.

다만 이를 분단 과정의 출발점 하나로만 제시하면, 그보다 앞선 북한의 별도 중앙권력 구축이라는 시간순이 빠집니다.

행정을 집행하고 토지개혁 법령까지 공포한 정부 기능은, 38선 이북에서 이미 넉 달 먼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그 흐름 앞에서, 통일정부로 가는 협상이 무기한 휴회로 멈춰 선 뒤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 뒤

4:49

그럼에도 남과 북은 각자의 길을 걸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들어서며 분단은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정읍발언은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분단을 처음 만든 말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이던 남북의 분리 과정과 미소공위 무기한 휴회 속에서 나온 대응이었습니다.

에필로그

5:12

1946년 6월 3일, 정읍.

그날의 말 한마디를 이해하려면, 그보다 먼저 38선 이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이 영상이 쓴 사료 · 8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하고 댓글 남기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