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가 남긴 기록 2편 — 눈물과 냉소
10년 만의 첫 줄
1:021906년 7월에 끊긴 그의 일기는 1916년 1월 1일에 다시 시작됩니다.
이 공백 안에는 1편에서 말씀드린 105인 사건으로 약 3년간 투옥됐던 시기도 포함돼 있습니다.
10년 만에 다시 쓴 그 첫 줄은 이렇습니다.
"총독과 다치바나, 야마가타 이소오, 아베, 우사미 등을 찾아가 명함을 남겼다. 총독 관사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경시 구니토모를 만났다."
I called on the Governor-General, Tachibana, Yamagata Isoo, Abe, and Usami, and left my card. While waiting a while in the Governor-General's residence reception room, I met Police Inspector Kunitomo.
10년 만에 다시 펜을 든 사람이 처음 적은 일은,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들에게 신년 인사를 다닌 기록이었습니다.
이 한 줄만으로 그의 노선 전환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사실로 남겨두겠습니다 — 일기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 그는 이미 총독부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수감 중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그 시기에 그가 쓴 일기가 현존하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신년 예방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921년 1월 1일, 3·1운동이 지나간 뒤에도 그는 또 사이토 총독의 관저를 찾아 카드를 남깁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총독부 고위 인사에게 신년 인사를 다니는 모습은, 이후 여러 해의 일기에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그가 인정한 것
2:091919년 2월 27일, 그러니까 3·1운동이 터지기 이틀 전입니다.
고종의 장례 행렬을 보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 날, 그는 이렇게 씁니다.
"조선인은 참을성이 많고 무던하며 호전적이지 않아, 민족의 본능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태황제를 향한 백성들의 애도와 도쿄 유학생들의 술렁임은, 그 본능이 다른 어느 민족 못지않게 조선인의 마음속에서도 불멸함을 증명한다."
Because Koreans are patient, stolid and unwarlike, one may think that they have no racial instinct. But recent events — the popular mourning for the departed Ex-Emperor and the agitations of Korean students in Tokyo — are a conclusive proof that racial instinct is as immortal in the Korean's heart as it is in every other race.
조선인에게 민족의식이 없다는 통념을, 그는 이 문장으로 스스로 부정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이렇습니다.
"일본은 두 민족 모두를 위해, 친절과 아량으로 이 본능을 달래야 한다."
Japan ought to conciliate this instinct by kindness and generosity, for the sake of both races.
민족의식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가 내놓는 해법은 독립이 아니라 회유입니다.
조선인의 마음을 읽어 내는 눈과, 그 마음에 대한 답을 독립이 아닌 곳에서 찾는 태도가 같은 문단 안에 있습니다.
같은 날 오후, 그는 조선기독교청년회 간사회의를 열어 다음 일요일부터 사흘간 회관 안의 모든 공개 집회를 중단하기로 결정합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다가온다는 것을, 그는 이미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만세 소리 앞에서
3:17이틀 뒤, 3월 1일이 옵니다.
영상 초반에 읽어 드린 그 일기의 앞뒤를 조금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오전 10시, 그는 오늘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오후 1시가 조금 지나 형사들이 YMCA 회관에 들이닥쳐 방과 서랍을 샅샅이 뒤집니다.
그리고 1시 반, 거리에서 함성이 들립니다.
"창밖을 보니 학생들과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종로 쪽으로 뛰어가며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Looking out through the windows we saw the streetful of students and others running toward the Bell Square shouting 'Mansei'. The boys waved caps and handkerchieves.
그리고 앞서 읽어 드린 그 문장이 이어집니다 — 애처로워서 눈물이 났다고.
그런데 같은 날, 같은 손으로 그는 독립선언서와 손병희를 깎아내립니다.
학생들의 순수한 헌신에 대한 연민과, 그 운동을 이끈 지도부에 대한 경멸이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있습니다.
그는 이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이 운동을 차갑게 구경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비웃었습니다.
이틀 뒤인 3월 3일, 고종의 국장 날입니다.
그는 이렇게 적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으로, 나는 옛 황제의 관을 향해 경건히 모자를 벗었다. 상여가 엄숙하게 지나갈 때, 일부 일본인들은 웃었고 일부는 모자를 벗지 않았다."
With sadness indescribable I reverently took off my hat to the Bier that contained the mortal remains of the Ex-Emperor. As the bier passed by us in great solemnity, some of the Japanese laughed while others kept their hats on.
그는 대열을 지키던 조선인들이 그 일본인들에게 "뭐가 좋아서 웃느냐"고 쏘아붙였다는 것까지 그대로 적어 놓았습니다.
자기 나라 황제의 죽음 앞에서 그는 조선인이었습니다.
일본인의 무례를 조선인의 분노와 함께 기록한 사람입니다.
이 대목을 빼놓으면 우리는 그를 읽는 게 아니라 편집하는 것이 됩니다.
그가 반대한 것
4:46반년 뒤인 1919년 9월 2일, 강우규 의사가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집니다.
총독은 다치지 않았지만 주변에 여러 사상자가 났습니다.
그날 그는 이렇게 씁니다.
"애비슨 박사에게서, 어떤 멍청이가 사이토 제독에게 폭탄을 던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딱한 일이다. 조선인들은 이토 공을 암살한 일이 병합을 앞당겼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바보들 같으니."
Was astounded to learn from Dr. Avison that some fool had thrown a bomb at Admiral Saito. Too bad. Had the Koreans forgotten that the assassination of Mr. Ito hastened the annexation? Fools!
이 대목에서 그가 명시적으로 비판한 것은 암살과 폭탄 투척이라는 방법이었습니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오히려 병합을 앞당겼다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독립이라는 목표 자체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 문장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3·1운동을 보며 울었던 바로 그 사람이 반년 뒤 무력 저항을 "바보짓"이라 부른 것은 사실입니다.
민족의식은 인정하고, 만세 시위에는 눈물을 흘리고, 그러나 총을 들거나 폭탄을 던지는 순간부터는 등을 돌립니다.
적어도 이 시기 그의 기록에서, 무력을 향한 반대는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관행이 된 밀착, 사라지지 않은 비판
5:491920~30년대 여러 해의 설날 일기에는 같은 장면이 반복됩니다.
1925년 새해 첫날, 그는 이렇게 적습니다.
"모든 축복이 흘러나오는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올 한 해는 온 세상에, 그리고 특히 조선과 우리에게 평화로운 해가 되게 해주시기를 빈다. 총독 관저와 그 밖의 네 사람의 집을 찾아 신년 명함을 돌렸다."
Praise God from whom all Blessings flow! God grant this year may prove a year of peace to the world in general and to Korea and to us in particular! Paid card-new-year-visits to Governor-General, and four other persons.
1930년 새해에도 같은 문장이 반복됩니다.
총독 관저, 정무총감 관저, 관할 경찰서장 관저를 찾아 명함을 남겼다고 적습니다.
그리고 1931년 새해, 그는 이렇게 씁니다.
"지난 한 해가 근심과 불안으로 가득한 해였던 만큼, 올해는 부디 마음이 평온한 한 해가 되기를.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총독과 정무총감을 비롯해 몇 사람의 자택을 찾아 신년 명함을 전했다."
May this year be a year of peace of mind, as the year just gone was a year of so much worry and anxiety. Snow all the day. Paid my card visit to the Governor Genl., Vice Gov. Genl., and a few others.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던 해에도, 3·1운동이 지나간 뒤에도, 이 장면은 다시 나타납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 그의 일기에는 전혀 다른 목소리도 있습니다.
1932년 1월 11일, 그는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옹호하는 어느 서양 선교사의 주장에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 선교사는 군국주의의 상징인 '칼'이 일본의 큰 신사들에 봉안되어 최고의 신성한 숭배 대상 가운데 하나로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일본에서 무공을 세운 영웅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이 또 있는가? …일본이 군국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 선교사는 일본을 모르거나, 아니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Does the missionary know that the 'Sword,' the symbol of militarism, is one of the supreme objects of divine worship, enshrined in the great Shinto temples of Japan? Who is more honored in Japan than a military hero? ...that missionary who contends that the Japanese are not militaristic either doesn't know Japan or says an untruth.
같은 달 26일에는 상하이와 만주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행동을 전하는 신문 기사를 읽고 이렇게 적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일본은 자신이 위험하고 거북한 이웃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충분히 입증해 보였다. 자신의 이익이 요구하기만 하면, 왕비를 시해하는 일도, 지도자를 열차 안에서 폭사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Right or wrong, Japan has given an ample proof to the world that she is a dangerous and uncomfortable neighbor. When her interests so demand, she doesn't scruple at murdering a queen in her own chamber, or blowing up a ruler of three great provinces in a Japanese train.
총독부 고위 관료에게 세배를 다니는 사람과, 일본의 군사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같은 시기, 같은 일기장 안에 있습니다.
협력과 냉소가 그의 삶에서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실력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8:01이 무렵 그는 흥업구락부라는 조직에 관여합니다.
통용되는 결성일은 1925년 3월 23일입니다만, 흥미롭게도 그날 그의 일기에는 이 조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 그날 그는 부친 묘소 인근의 광업권 분쟁을 상의한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비밀결사의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던 만큼 의도적으로 일기에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고, 통용되는 결성일 자체가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조사에서는 어느 쪽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1933년 10월 4일 일기에는 이 시기 독립운동 계열 내부의 균열이 드러납니다.
그는 신흥우와 여운형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옮겨 적습니다.
"서북 사람들의 자금으로 전액 운영되는 조선일보가 안창호를 위한 자리로 준비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안창호는 기호나 경기·충청 계열을 먼저 없애야 한다고, 일본인은 근래의 원수일 뿐이지만 기호 조선인은 서북 사람들의 오백 년 원수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있다."
It is well understood that the Chosun Ilbo, entirely financed by Northwestern men, is being prepared as a job for Mr. Ahn Chang-ho, who is reported to have said that the Kiho, or Kyonggi and Chungcheong faction, must be destroyed first — that the Japanese are enemies of recent years, while the Kiho Koreans are enemies of the Northwestern people for five hundred years.
윤치호는 이 말을 안창호가 직접 했다고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전해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안창호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자신도 믿기 어렵다고 같은 날 일기에 덧붙였습니다.
다만 서북 계열 사람들 대부분은 안창호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고 믿고 있다는 것도 함께 적었습니다.
신흥우와 여운형은 그에게 서북 계열에 맞설 남선 세력의 결집을 제안합니다.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큰 목표 아래에서도, 지역과 정파를 가른 반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반목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사라진 2년
9:28그리고 다시, 기록이 끊깁니다.
1935년까지 이어지던 일기는 1938년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 사이 2년, 국사편찬위원회 수록본에도, 원본을 소장한 미국 에모리대학교의 목록에도 이 시기의 일기가 없습니다.
1편에서 우리는 1906년부터 1915년까지 9년의 공백을 봤습니다.
그때는 105인 사건과 투옥이라는, 적어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그가 갇혀 있었다는 기록도, 쓰지 않았다는 기록도, 무언가 사라졌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현재 확인되는 소장 목록에 이 2년이 그냥 없습니다.
왜 없는지는 이번에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공백이 시작되기 직전, 그는 일본군의 대외 행동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백 뒤의 기록에서는, 그의 협력이 행동으로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냉소에서 실행으로
10:141938년 6월 22일, 그는 이렇게 짧게 적습니다.
"오후 3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들이 부민관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3 p.m., the promoters of the Korean Union of the National Mobilization held its Promoters' Meeting in the Citizens' Hall.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단체입니다.
아무 소회도 논평도 없이, 사무적으로 한 줄만 남겼습니다.
1940년 1월 4일, 총독부가 조선인의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창씨개명 정책을 놓고 그는 이렇게 적습니다.
"미나미 총독은 조선인에게 일본식 성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문제는 바로 그 발표 안에서,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채택한다면 흡족해하겠다는 뜻을 숨김없이 내비쳤다는 점이다. …다양함이야말로 삶에 맛을 더하는 양념이다. 그들 모두를 모든 면에서 똑같이 만들려는 강요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어리석은 정책이다."
General Minami officially declared that he has no idea of forcing Koreans to adopt the Japanese form. The trouble is that in the same statement he said things that unmistakably intimated that he would be gratified if Koreans did adopt the Japanese names. ...Variety is the spice of life. To compel them to be exactly alike in everything is an impossible and foolish policy.
그리고 다섯 달 뒤인 1940년 6월 17일, 그는 이렇게 씁니다.
"오늘 오후, 우리 집안의 성을 일본식으로 이토(伊東)로 바꾸고 이름까지 고친 신고서를 인구조사 기록을 위해 경성부청에 제출했다. 오늘부터 내 정식 이름은 伊東致昊, 로마자로는 T.H. Ito다."
The Japanization of our family surname into Ito (伊東), with change of names, presented to the Mayor's Office for Census Record this afternoon. From this day my full name is 伊東致昊, or T. H. Ito in Japanese.
다섯 달 전 그 정책의 모순을 정확히 짚어낸 사람이, 그 정책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1편에서 우리가 본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 명석한 진단과, 그 진단과 어긋나는 행동이 같은 사람 안에 있습니다.
이름을 건 협력
11:481941년 5월, 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고문에 임명됩니다.
같은 해 9월부터 10월 사이, 그는 흥아보국단과 조선임전보국단이라는 전쟁 지원 단체의 통합 과정에 관여합니다.
그리고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그의 이름으로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글이 두 차례 실립니다.
11월 18일 「총출진하라」, 11월 22일 「학병을 보내는 명사의 말」입니다.
다만 이 두 글을 그가 직접 썼는지, 총독부가 명의만 빌린 것인지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실렸다는 사실과, 그가 직접 붓을 들었다는 사실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덟 달
12:29전쟁이 끝나기 넉 달 전인 1945년 4월 3일, 그는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의 조선인 몫 칙선의원 7인 중 한 명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그해 8월, 일본이 항복합니다.
그로부터 약 넉 달 뒤인 12월 6일, 그는 개성 장남의 집에서 뇌일혈로 세상을 떠납니다.
귀족원에 임명된 지 약 여덟 달 만이었습니다.
그가 자결을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다만 확인된 것은 최종 사인이 뇌일혈이라는 사실뿐입니다.
자결을 시도했다는 것을 뒷받침할 자료는 이번 조사에서 찾지 못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것을 사실처럼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 뒤
13:04그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1948년 10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약 3년 뒤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사와 처벌을 받지 않았을 뿐, 그의 행적이 훗날 친일반민족행위로 평가받는 것을 피한 것은 아닙니다.
1편에서 우리는 스물몇 살의 그가 미국의 인종차별을 꿰뚫어 보면서 동시에 중국인을 멸시하고, 조선 정부에 절망하며 일본을 동경하는 것을 봤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씨앗이 어디로 갔는지를 봤습니다.
그는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인정하면서 회유를 권했고, 만세를 부르는 학생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그 운동의 지도자들을 비웃었고, 일본의 군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총독부 관저에 매년 세배를 다녔고, 창씨개명의 모순을 짚어내면서 그 정책을 따랐습니다.
이 문장들은 서로를 지워 주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만 골라 그를 변호하거나 규탄하는 순간, 우리는 그를 읽는 대신 우리의 결론을 읽게 됩니다.
1편의 제목은 「같은 페이지의 두 문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따라간 것은, 그 두 문장이 평생에 걸쳐 반복된 기록입니다.
그는 옳은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채로, 그 눈이 가리키지 않는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문장들도 지어낸 것이 하나 없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원문이 그대로 올라와 있습니다.
누구나, 지금, 직접 열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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