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가 남긴 기록 1편 — 같은 페이지의 두 문장
그는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1:00먼저 이 편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윤치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예순 해에 걸쳐 일기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한문으로 썼고, 다음에는 우리말로 썼습니다.
그러다 1889년 12월, 그는 이렇게 적습니다 — 오늘부터 영어로 일기를 쓰기로 작정한다고.
그리고 그 뒤로 이 일기는 영어로 이어집니다.
조선 사람이 조선에서, 영어로 일기를 썼습니다.
이 일기는 지금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원문과 국역이 함께 올라와 있습니다.
원본은 미국 에모리대학교 도서관에 있습니다.
누구나 열어볼 수 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이제부터 보게 될 것이 남이 그를 어떻게 평가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그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이기 때문입니다.
변명할 기회도, 꾸밀 기회도 없이 그날그날 적어 놓은 기록입니다.
다만 하나 미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일기에는 비어 있는 구간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뒤에서 따로 하겠습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납니다.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젊은 개화파가 정변을 일으켰다가 사흘 만에 무너진 사건입니다.
윤치호도 개화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때 일기에 적은 말은 이렇습니다.
"식견이 없어 사리를 헤아리지 못하고, 지혜가 없어 시세에 어두운 일이었다."
"Without learning, they could not reason; without wisdom, they were blind to the times."
정변을 일으킨 사람들, 그러니까 자기가 가깝게 지내던 개화파 인사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열아홉 안팎의 나이에 그는 이미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냉정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특징이 여기서 이미 드러납니다 — 그는 누구의 편에 서기보다 먼저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대개 가혹했습니다.
남에게도, 자기 나라에도.
자유의 땅에서 구경거리가 되다
2:33정변이 실패한 뒤 윤치호는 조선을 떠납니다.
유학을 간 것이 아니라 망명이었습니다.
정변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주역들과 가까웠던 탓에 신변이 위태로웠습니다.
1885년 1월 상하이로 건너가 중서서원에서 삼 년 반을 공부했고, 감리교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1888년 미국에 갑니다.
밴더빌트를 거쳐 에모리에서 1893년까지 배웁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미국 남부였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스무 해 남짓, 노예제는 법으로 사라졌지만 인종 분리는 그대로였던 시절입니다.
1890년 5월, 그는 이런 일을 겪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네 고장 형제들에게로 가야겠구나."
"You will have to go then to your town bretheren..."
'네 고장 형제들'이란 그 동네에서 세탁일을 하던 중국인들을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너는 우리와 같은 자리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날 일기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 드러내 놓은 모욕이 오전 내내 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this undisguised insult-made me perfectly wretched all the morning."
같은 해 2월에는 시험을 잘 봤다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칭찬의 내용이 이랬습니다 — 조선 사람이 이런 답안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교도를 가르칠 값어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의 답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윤치호는 그 칭찬을 일기에 이렇게 받아 적었습니다 — 내려다보며 던진 말이라고.
칭찬조차 그를 문명 바깥에 세워 놓고 건네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구조를 그 자리에서 알아봤습니다.
1893년 11월 1일, 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에는, 남부에서처럼 나를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while I was in Japan no one noticed me with so much curiosity as they did in the South."
미국 남부에서 그는 사람들의 구경거리였다는 뜻입니다.
1892년 2월에는 이런 일도 적혀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 앞에서 조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질문. 그들,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은 빛과 어둠이 어떻게 생기는지 압니까?"
"Question. 'Do they (Coreans) know how light and darkness are caused?'"
조선 사람이 낮과 밤이 왜 생기는지 아느냐는 질문입니다.
윤치호는 이 질문과 자기 대답을 일기에 나란히 적어 놓았습니다.
그가 뭐라고 답했는가 하면,
"대답. 모릅니다. 다만 해가 지면 어두워진다는 것은 압니다."
"Answer. 'No except that they know it is dark when the Sun goes down.'"
매를 맞거나 쫓겨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보다 조용하고,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종류의 경험입니다 — 자기가 문명 바깥의 사람으로 취급받는 자리에 매번 앉아 있는 것.
그는 미국에서 배우는 동안, 동시에 자기가 무엇으로 보이는지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가 본 것과, 그가 물려받은 것
4:48그리고 1890년 2월 14일, 첫머리에 읽어 드린 그 일기가 나옵니다.
"이 '자유의 나라'에서 인간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는 그 권리를 누리려면, 백인이어야 한다."
"if you want to enjoy the so-called inalienable right of man in this 'Land of Freedom' you must be white."
미국 독립선언서에 적힌 '빼앗을 수 없는 권리'라는 말을 그대로 가져와, 그 권리가 실제로는 피부색에 따라 주어진다고 적은 것입니다.
미국의 자유가 어디까지인지를, 그는 그 안에서 살면서 정확히 봤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그는 미국에 온 중국인 이민자들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미국으로 건너오는 중국 이민자들은 필연적으로 그 제국의 밑바닥 찌꺼기들이다."
"The Chinese immigrants who come to America are necessarily the offscouring of the Empire."
차별받는 쪽에 서 있던 사람이, 같은 날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백인이 조선인을 문명 밖으로 밀어내는 방식 그대로, 그는 중국인을 밀어냅니다.
이 대목을 두고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르고 싶어집니다.
앞 문장만 인용해서 그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다고 하거나, 뒷 문장만 인용해서 결국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거나.
그런데 사료는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두 문장은 같은 페이지에 있습니다.
골라내는 순간 우리는 그를 읽는 게 아니라 우리 결론을 읽는 겁니다.
조선에서 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
5:52그 모욕을 적은 날로부터 두 주 뒤, 그러니까 1890년 5월 18일에 그는 조선의 앞날을 놓고 긴 글을 씁니다.
그가 첫머리에 꼽은 것은 스스로 고치는 길이었습니다.
"잘 훈련된 군대를 세우는 일. 쓸모없는 하급 관리들을 모조리 쓸어내고 정부를 다시 짜는 일. 언론과 말의 자유. 그리고 교육."
"The organization of a welldisciplined army; the reconstruction of the government. sweeping away all the good-for-nothing petty officers; freedom of press and speech; education."
언론의 자유와 교육.
그가 미국에서 보고 배운 것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이렇습니다.
"그러나 왕비와 그 일파의 이기심, 그리고 임금 곁에 좋은 조언자가 없는 형편 때문에, 그런 개혁은 조선에 바라기에는 너무 과분한 일이다."
"But, owing to the selfishness of the Queen and her party and the want of good counsellors for the King, such reformation is too good to be expected of Corea then!"
개혁안을 스스로 적어 놓고, 그 아래에 그 개혁이 불가능한 이유를 자기 손으로 적었습니다.
그가 지목한 것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 왕비와 그 주변, 그리고 임금 곁의 사람들.
그리고 그는 대안들을 늘어놓습니다.
그중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영국이나 러시아의 통치 아래라면 백성은, 백성으로서, 많은 고통을 덜고 여러 이로움을 누릴 것이다. 다만 나는 러시아보다 영국 쪽이 훨씬 낫다고 본다."
"Under English or Russian rule the people-as a people-will have much sufferings removed and many advantages enjoyed. But I prefer English to Russian rule-by far."
자기 나라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어느 쪽 지배가 더 나은지를 비교까지 해 가며 적었습니다.
스물 몇 살의 유학생이, 일기에, 그렇게 썼습니다.
여기서 정확히 볼 것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식민 지배를 찬양한 문장이 아니라, 자기 나라가 스스로 고쳐질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한 문장입니다.
그는 다섯 갈래의 길을 늘어놓고 그중 덜 나쁜 것을 고르고 있었고, 그 목록 안에 조선이 스스로 해낸다는 길은 이미 지워져 있었습니다.
1893년 11월, 그 절망이 어디로 향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저 지옥 같은 정부가 존속하는 한, 나는 조선에서 살고 싶지 않다. 오, 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
"I don't want to live... in Corea as long as its infernal government lasts. O blessed Japan! The Paradise of the East!"
이 문장이 나온 날짜를 다시 보십시오.
1893년입니다.
을사조약보다 십이 년, 한일병합보다 열일곱 해 전입니다.
그가 나중에 일본에 협력했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닙니다.
순서가 반대입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미국 남부에서 자기가 구경거리였다는 회고와 같은 날 같은 일기에 적혀 있습니다.
바깥에서 문명 밖의 사람으로 취급받은 경험과, 자기 나라를 향한 혐오와, 일본을 향한 동경이 한 페이지 안에 같이 있습니다.
그가 조선을 미워하게 된 자리와 그가 일본을 올려다보게 된 자리는 다른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돌아온 사람
8:111895년, 윤치호는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해 2월, 이렇게 씁니다.
"조선의 정치는 그 사람들이 사는 집만큼이나 더럽다."
"The politics of Corea are as filthy as its habitations."
그런데 그해 10월, 그의 붓끝이 향하는 곳이 달라집니다.
왕후를 폐위하자는 논의가 나오자 그는 이렇게 따집니다.
"우리는 정말 독립해 있는가? 우리는 정말 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가? 일본인들을 불러들여 궁궐을 습격하고 우리 왕비를 죽이게 한 것을, 독립이라 하는가?"
"Are we really independent? Are we really free from foreign interference? What! Is it independence that Japanese are invited to attack the Palace and murder our Queen?"
두 해 전 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라고 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같은 사람이, 일본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를 보고 이렇게 씁니다.
이 대목을 우리는 빼지 않겠습니다.
앞에서 그의 일본 동경을 읽었으니 여기서 이 문장도 읽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읽는 게 아니라 그를 편집하는 겁니다.
같은 달 그는 조선의 왕을 황제로 높여 부르자는 논의에도 반대합니다.
이름을 높인다고 바깥에서 대접이 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조롱을 부를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1898년 7월, 독립협회가 올린 상소의 요지를 그는 이렇게 적습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자격 없는 신하들 탓만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당장의 편안함을 위해 나라의 앞날을 내던지려는 전하의 뜻 때문이기도 하다."
"...the desire of His Majesty to sacrifice the ultimate welfare of the state to the ease of the present moment."
신하가 아니라 임금을 겨눈 문장입니다.
그의 비판에는 성역이 없었습니다 — 일본에도, 조정에도, 임금에게도.
냉정하게 보면 그 판단들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게 이 사람의 곤란한 지점입니다 — 그의 진단은 자주 맞았고, 그 진단이 그를 조국에서 점점 더 멀리 데려갔습니다.
자기 나라를 정확하게 보는 일과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 이 사람에게서는 같이 가지 않았습니다.
사라진 기록
9:47그리고 일기가 끊깁니다.
현존하는 일기는 1906년 7월 3일에서 끊기고, 1916년 1월 1일에 다시 시작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수록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에모리대학교가 소장한 현존 원본 목록에도 그 사이가 비어 있습니다.
그가 쓰지 않았는지, 썼는데 압수되거나 없어졌는지 — 확인할 수 없습니다.
어느 자료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십여 년 동안 일기를 이어 온 사람의 기록에서, 하필 그 십 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십 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구간입니다.
그 공백 속에서 일어난 일은 이렇습니다.
1911년, 일제는 조선총독 암살 음모가 있었다며 수백 명을 잡아들입니다.
나중에 105인 사건이라 불리게 되는 사건입니다.
일제 당국은 윤치호를 이 사건의 최고 인물로 지목했습니다.
1912년 9월, 1심에서 징역 10년.
1913년 10월, 최종심에서 징역 6년이 확정됩니다.
당시 공판 보고와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설에 따르면, 그는 심한 고문 끝에 음모를 시인했다가 법정에서 그 자백을 강력히 부인했습니다.
일제 당국은 고문을 부인했습니다.
1915년 2월, 그는 특사로 풀려납니다.
형은 6년이었지만 실제로 갇혀 있던 기간은 약 3년이었습니다.
자기 나라를 그토록 혹독하게 비판하던 사람이, 총독을 죽이려 모의했다는 혐의로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당시 공판 보고와 국사편찬위원회 해설에는 그가 고문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일제 당국은 이를 부인했습니다.
그 3년 동안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리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 시기에 그가 쓴 일기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록이 없는 자리를 우리가 채워 넣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것만은 사실입니다 —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윤치호와 나온 뒤의 윤치호 사이에, 그가 자기 손으로 남긴 기록이 없습니다.
여기서 멈추는 이유
11:25이 편은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1915년 2월, 그가 감옥 문을 나선 자리입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오늘 우리가 그를 부르는 이름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붙는 과정을, 오늘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구간을 읽을 기록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일기는 1906년 7월에 끊기고 1916년 1월에 다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그 뒤의 윤치호를 다루려면, 오늘 우리가 읽은 것과는 다른 묶음의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합니다.
그건 이 한 편에 얹을 일이 아닙니다.
오늘 이 편이 따라간 것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 한 명석한 젊은이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물려받았고, 어디에서 자기 나라를 포기했는가.
우리는 이 편에서 윤치호를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문장을 골라내지 않고 그대로 읽었을 뿐입니다.
그가 미국의 인종주의를 꿰뚫어 본 것도 사실이고, 같은 날 중국인을 찌꺼기라고 쓴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의 병을 정확히 진단한 것도 사실이고, 그 진단 끝에 남의 지배가 낫다고 쓴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제가 그를 총독 암살 음모의 최고 인물로 지목해 3년을 가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문장들은 서로를 지워 주지 않습니다.
한쪽으로 다른 쪽을 덮으려 할 때, 우리는 사람을 읽는 대신 결론을 읽게 됩니다.
그 시대에 그만큼 명석했던 젊은이가 왜 저기까지 갔는가.
오늘 우리는 그 절반까지 따라왔습니다.
스물몇 살의 일기에 이미 씨앗이 다 들어 있었다는 것까지가, 그가 직접 써 놓은 기록으로 확인되는 데까지입니다.
나머지 절반 — 감옥에서 나온 뒤의 윤치호는, 1916년부터 다시 이어지는 그의 일기로 따로 읽겠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문장들은 지어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원문이 그대로 올라와 있습니다.
누구나, 지금, 직접 열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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